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오늘은 주무세요

환자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며 고생하다가 아침에 회진을 갔더니 나에게 메모를 건넨다. 지금의 내 상태는 산소없이 스스로 생존하지 못합니다.자신의 생존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셈입니다.마스크에 이어진 산소가 끊어질까봐 온 신경을 쓰며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안정제, 진통제, 수면제, 왕창 투여하면서 산소를 끊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숨차하면서 고통스럽게 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면서 죽으면 좋겠습니다. 환자는 그저께부터 마스크를 통해 산소를 최대한 공급받으며 호흡을 유지하고 있다.폐로 병이 많이 진행되어 그렇다. 심폐소생술이나 인공삽관은 하지 않기로 했다. 혈압이 떨어져도 아무 조치도 하지 않기로 했다.환자 스스로그리고 환자 아머니도 그렇게 결정하셨다. 단호하게. 환자는 나랑..

Flying Fish

1992년작흐르는 강물처럼 (A river runs through it)난 그 영화 포스터가 좋다. Flying Fish, 그 낚시대의 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그 흐르는 곡선을 보면,그 흐르는 강물을 보면,나도 그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포스터에서 플라잉 피쉬를 하고 있는 건 아마 둘째 아들이 아닐까?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범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형과는 달리그는 목사인 아버지의 엄격함을 따르지 않았고낚시하는 법 마저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였다. 그리고 그는 흐르는 강물처럼 자유롭게 살다가 죽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산다는 것은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용하며 평화롭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흐름에 자신을 맡긴 채 항상 새로운 곳을 찾아 흘러간다. 그래서 존..

편지하세요

아저씨들은 아파도 아프단 말씀을 안하신다.이리 저리 말을 바꿔서 다양하게 질문을 해봐야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대략 파악할 수가 있다.그냥 인자한 표정으로 자신의 품격을 유지하며 견딜만하다는 대답을 하시는 정도다. 내가 주로 여자 환자를 진료해서 그런지이에 대별되는 남자 환자들의 특징이 잘 느껴진다. 일단당신 말씀을 잘 안하신다.질문도 별로 없으시다.당신 증상에 대해서도 표현을 잘 안하신다.그래서 어디가 얼만큼 불편한지, 통증은 어떤지, 새로 생긴 증상은 없는지, 약물 부작용은 없는지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 검사 결과나 다른 설명을 해 드려도 별로 반응이 없다.평소 여자 환자들과는 수다스럽게 별 얘기를 다 하는 나로서는 좀 어색하기도 하다.여자 환자들은 내가 무슨 말 한번 하면 그건 왜 그러는 거냐..

좋아하는 나에게 아무말도 못하고

70세 넘은 할머니가탁소텔 9번을 잘 견뎠다.체중도 별로 안 변하고입맛도 별로 안 떨어지고무엇보다 간전이가 많이 좋아지셨다. 두번 항암치료 하고 CT를 찍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할머니 연세도 많으시고조영제 쓰는거 부담이 되어서 꾹 참고 세번 항암치료를 마치고 CT를 찍었더니 아주 많이 좋아지셨다.나는 또 참지 못하고 좋아하는 티를 내 버렸다.할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걸 보니 많이 좋아지긴 좋아졌다 보다 하셨다.CT 보여드렸지만내가 본다고 뭘 알겠어 그냥 하라는 대로 하는거지 뭐 그러셨다. 탁소텔은 3-4회 이상 맞으며 전신부종이 동반되는 경우가 흔하고 말초혈관염도 심한 약이라 6번 정도에서 약을 중단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할머니는 그런 부작용이 없었다. 70 넘은 할머니가 대단하다 싶었다. 그렇지만 ..

뇌전이 검사, 미리 해보면 안될까요?

어떤 스크리닝 검사를 하는 것이환자에게 이득이 될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일찍 검사해서 발견을 빨리 했을 경우 치료를 잘 해서 생존율이 향상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방암 수술을 하고 현재까지 할 수 있는 표준적인 조치로 모든 치료를 다 했을 때현재의 가이드 라인에서 권고하는 검사 간격은 대개 6개월, 위험요인이 있으면 3개월 간격으로 병원에 내원하게 한다.3개월 간격으로 검사를 하라는 말은 아니다.의사가 진료하고 유방 수술 부위를 점검하고 환자에게 다른 불편한 증상이 없는지를 경과관찰 하라는 의미에서 병원에 내원하게 한다.세계적인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하는 검사항목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검사항목보다 훨씬 단촐하다. 미국은 비용이 많이 드니까, 유럽은 국가가 돈을 많이 내야 하니까,..

고딩 엄마들 진료실에서 만나다

남들보다 항암치료를 힘들게 받은 그녀.탁소텔 맞으면 원래 몸이 좀 부어서 못 먹어도 몸무게가 늘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환자는 치료 중에 어찌나 못 먹고 힘들어 했는지 항암치료를 마치고 나니 몸무게가 7-8kg 가까이 줄었다. 항암치료 후유증 때문에 기운이 없기도 하고빠른 시간 내에 몸무게가 너무 갑자기 줄어서 기운이 없기도 했다.식욕이 없어서 식욕촉진제를 드려보기도 하고 하고폐경기 증상 때문에 온 몸이 아파서 각종 진통제를 드려도 봤다.약 부작용이 너무 심해 그런 약들의 효과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우여곡절끝에 치료를 다 마쳤다. 오늘은 치료를 마치고 처음으로 유방암 종합검사를 하였다. 결과는 오케이. 아무 이상이 없으시다. 보통 검사 결과가 좋네요. 다행이에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대개 환자들이 활..

빚쟁이 인생

3월 들어 매주 발표가 2번 정도 있다.외부 강의도 있고원내 발표도 있고발표를 하는 건나에게 남는 게 없는 장사지만그래도 요청이 있을 때 적절한 이유를 댈 수 없으면 결국 하게 된다.잠 설쳐가면서 준비하고제대로 준비가 안 되 괴로워한다.그런 시간을 일주일에 두번씩 거치고 나니,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꼭 거절해야지 그런 결심을 하게 된다.그런 발표 준비할 때 은근 강박적인 습성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대충 못하고 괴로워 하면서 준비하는 나를 발견한다.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면 다시 저널을 찾아 페이지까지 꼭 명시하고적절한 그림, 사진 찾을 때까지 구글링하고 글씨 크기 정확히 맞추고색깔 통일적으로 쓰고 밑줄 부호 도형위치를 정확히 맞추느라마우스질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아주 피곤한 스타일로 변한..

엄마의 일기장

기도했건만 온 가족이 노력했건만 엄마는 힘겹게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돌아가셨다. 아직 많이 늙지 않은 엄마. 아직 많이 크지 않은 동생.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부족한 나. 인생의 모든 것을 완전히 누리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미쳐 하지 못한 상태에서 엄마는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어색하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3월 새학기를 맞이하기 전에 시간맞춰서 돌아가신 것 같다. 3월부터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엄마의 당부이실까? 엄마의 일기장을 통해 엄마 생애의 마지막 심정을 유추해 본다. 끝까지 자식걱정 진로를 정하지 못한 고등학생 딸과의 실갱이 몸이 좀 나아지만 뭘 해봐야겠다는 결심 그리고 일기장 한 구석에는 몸을 좀 추스리게 되면 나를 만나고 싶다며 내 이름 석자를 적어놓으셨..

잡다한 증상 중에 중요한 증상을 놓치지 않기를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들에게는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 환자를 괴롭히는 문제는병 때문이기도 하고내가 처방한 항암제 때문이기도 하고수술의 후유증 때문이기도 하고암과는 완전히 무관한 다른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젤로다 때문에 발톱이 살속을 파고 들어가기도 하고이레사를 먹고 여드름이 나기도 하고진통제를 먹고 소변이 잘 안나오기도 한다.탁소텔 때문에 피부발진이 생기고 간지러움증이 심하기도 하고이리노테칸을 맞고 설사를 하기도 한다. 뼈 병변의 악화로 인해 고칼슘 혈증이 생기고 그것때문에 의식이 몽롱해지기도 하고방사선 치료 후 발생한 뇌 부종으로 인해 의식이 몽롱해지기도 한다. 내가 준 약 때문에 손이 떨리고 또 손떨리는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준 약 때문에 제대로 못 걷고 휘청거리기도 한다.병이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

몸무게가 늘지 않는 할머니

한달 사이에 몸무게가 8kg 이나 줄었다.재발한 유방암이 표준 치료에 별로 반응하지 않고 나빠지기만 할 때도 할머니는 몸무게가 줄지 않았었다.벌겋게 부은 유방에서 진물이 나서 꽤 오랜 기간 방사선 치료를 할 때도 할머니 컨디션은 좋았다.몇가지 표준 치료 약제의 실패 이후, 임상연구로 치료를 시작한지 8개월, 처음으로 할머니 병이 좋아지고 있는 참이다.CT 상으로 보이는 병은 많아 좋아졌다. 객관적인 지표상 드물게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최근 몸무게가 급격히 감소하였다.70이 다 된 노인이 한달 사이에 몸무게가 8kg 이나 빠지니 당연히 기운이 없다.기운이 없으니 기분도 울적하다.병이 나빠지고 유방에서 진물이 흘러 매일 옷을 적셔도 우울해하지 않고 열심히 치료받던 할머니가 요즘은 치료의 의욕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