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45

암환자가 무슨 죄인인가요?

암환자가 무슨 죄인인가요? 내가 학생 때 족보로 외우던 폐암의 예후. 첫 진단 당시 Pericardial effusion이 있으면 평균 수명 1개월, Pleural effusion 있으면 3개월, brain metastasis 있으면 6개월 미만. 그런 형편없는 예후를 보면서 내심 ‘폐암에 걸리면 예후도 않좋은데 힘들게 항암치료 받느니 그냥 진통제 먹으면서 통증조절만 하고 죽는게 낫겠다’고 결심했었다. ‘어차피 완치되지 않는다면 미련하게 삶에 연연하느니, 사는 날까지 살다가 죽지 뭐…’ 그러나 나는 한번도 치료받지 않고 죽게 되는 암환자들이 진통제로도 조절되지 않는 통증으로 얼마나 고통받는지, 반면에 얼마나 나이스하게 항암치료를 하면서 일상을 누리고 사는지 그런 암환자들의 대별되는 삶의 경로를 보면서 ‘..

저도 제 목소리를 들으니까 눈물이 나요

저도 제 목소리를 들으니까 눈물이 나요 자기 사는 꼴이 심란하고 의기소침해지고 한심할 때가 있다. 딱 내가 요즘 그런 상황인데, 이렇게 총체적인 근본적인 감정 부전상태는 쉽게 사그러지지 않고 사소한 일에도 자꾸 재발하는 것 같다. 암튼 겨울이 되기도 전에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고 있다. 아침 저녁 회진도는 걸 즐기는 편인 내가 이 회진마저 귀찮게 느껴진다는 것은 병의 중증도가 꽤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제 오후에도 대충 회진을 돌아버려야겠다는 막되먹은 마음으로 병동으로 나갔다. 50대 후반의 아주머니. 2번의 항암치료를 하고 난 지금의 몸무게는 32kg, 극히 드문 감염증으로 쇼크에 빠지기를 수차례, 중환자실도 두세번 왔다갔다 하면서 입원한지 어느덧 4개월이 넘었다. Central line, fole..

어떤 사람이 좋은 의사인가?

어떤 사람이 좋은 의사인가 한 영국의 정신과 의사가 의과대학 입학 면접시험부터 의과대학 졸업까지 일군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식적, 비공식적 학교생활을 추적관찰하였다. 일종의 참여관찰 방법으로 진행된 이 연구는 의과대학을 지원하는 학생들의 면접을 공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의과대학 면접시험이라면 통상적으로 하는 질문, “자네는 왜 의과대학에 지원하게 되었나?” 혹은 “자네는 왜 의사가 되려고 하나?”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에 좋은 대답을 준비해 둘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천편일률적인 이유를 들며 의사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선한 의지를 밝힌다. ‘남을 도우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사회에 기여하는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훌륭한 의사선생님을 보고 감..

몸의 병이 마음을 좀먹나보다

몸의 병이 마음을 좀먹나보다 오후 회진 돌기전 나는 병원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며 밀린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과 외래도 아닌 다른 과 외래 근처에서 정처없이 병원을 헤매고 있던 그녀를 만났다. 약간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누구라도 건드리면 당장 울어버릴 것 같은 울먹울먹한 표정, 고정되지 않은 시선, 목적없는 느린 발걸음으로 병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10년도 더 전에 2기 유방암을 진단받았고 수술,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항호르몬치료를 다 받았으며 최초 진단 7년이 지난 후 병을 잊을만하던 시기에 수술 부위 국소재발을 다시 진단받았다. 재발 부위를 다시 수술할 수 있었고 각도를 조정하여 다시 방사선치료를 받았으며 또다시 항암치료를 받았다. 항암치료 후 장기간 항호르몬치료를 마친 지금은 눈에 보이는..

의사들의 정신불건강

의사들의 정신건강 난 보통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해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이어폰을 끼고 소리를 키워 무한반복해서 듣거나, 인터넷으로 책을 왕창 사서 읽거나, 시간이 되면 나를 아주 잘 이해해주는 지인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등의 탈출구를 찾아 내 안의 스트레스를 풀면서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는다.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문제가 좀 심각할 때는 밤늦도록 술을 마시거나 째즈음악을 연주하는 카페에 가서 멍하니 계속 음악만 듣고 앉아있는 등 현실을 좀 잊어보려고 외면하기도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해결의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아마도 95%이상의 사람들도 이런 방식으로 일상의 어려움에 부딪혔다가 해결하기를 반복하며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 안의 에너지, 의욕이 많이 소모되어..

가끔은 환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가끔은 환자와 즐거운 시간보내기 호지킨병이 완치되지 않고 자꾸 말썽을 피우며 재발하는 스물 여섯살의 김양.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예쁜 눈, 고운 피부, 날씬한(사실은 매우 마른) 몸매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내가 처음 본 그녀는 자기만큼 예쁜 글씨로 자그마한 다이어리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 내용을 훔쳐보지는 않았지만 암튼 자꾸 눈이 가는 다이어리였다. 매일 회진을 갈 때마다 그녀는 뭔가를 적고 있거나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글씨와 그림이 너무 궁금했고 그녀의 다이어리 곳곳에 그녀가 그린 예쁜 마스코트 그림이 너무 예뻐서, 급기야 내가 가지고 있던 펜 중에 제일 좋은 하이테크펜을 그녀에게 주며 ‘이거 선물이니까 나 그려달라’고 떼를 썼다. 예쁘지만 새침떼기 그녀는 5일짜리 ..

죽음을 통한 삶의 철학

죽음을 통한 삶의 철학 얼마전 국립암센터가 주최한 ‘품위있는 죽음을 위한 사회적 합의’ 심포지움에 다녀왔다. 내가 만나는 환자들은 대개 말기 암환자이기 때문에 환자들은 앞으로 남은 자신의 인생 어느 가까운 시점에 죽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의사는 통계적 자료를 바탕으로 산출된 평균 여명을 기준으로 환자의 운명을 가늠하고, 환자와 가족들은 드물게 기적처럼 좋은 예후를 보이는 사례를 믿으며 자신도 그 행운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늘을 버틴다. 평균과 기적. 그 간극만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거리가 유지되고 있다. 환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자신의 병이 암이라는 것, 그것도 완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4기..

항암치료 네트워크를 꿈꾸며

항암치료 네트워크를 꿈꾸며 전남 목포에 사는 김씨. 대장암 수술 3년만에 재발을 진단받았다. 3년전 대장암 수술을 서울의 큰 대학병원에서 한 탓에 그동안 외래 추적관찰은 서울을 오가며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에 재발된 곳은 다행히 간 한 군데라 수술을 시도해 볼 수도 있지만 위치가 양엽으로 3개가 있어 당장 수술하기 보다는 항암치료를 하면서 치료반응을 보아 향후 수술 가능성을 타진하기로 했다. 2주 간격의 항암치료를 위해 서울로 치료를 다닐 생각을 하니 치료도 치료지만, 시간과 돈도 걱정이다. 항암치료 중에 열이 나거나 항암제 합병증으로 고생하면 서울까지 가야하는 일도 막막하다. 그렇게 힘든 몸으로 서울 병원으로 가도 사람많은 응급실에서 환자 대접도 제대로 못받고 고생할 일이 눈에 뻔하다. 경남 창원에..

콩 화장품 임상시험에 참여하며

콩 화장품 임상시험에 참여하며 명단에 뜨는 할머니 나이는 만 70세인데 실재 나이는 74세라고 하셨다. 빈말 아니고 할머니는 60세 정도로 보인다고 말씀드리니 정말 좋아하신다. 특히 피부가 진짜 좋으시다고 하니 ‘내가 이나이에도 여자라고 일주일에 팩을 3번은 해요.’라며 자기관리의 정수를 보여주신다. 처음 위암을 진단받으셨는데, 대동맥 주위로 림프절 전이가 있어서 수술이 어려운 병기로 진단받으셨다. 원격 전이는 없으시지만, 병기 분류체계에 의하면 4기 위암으로 진단되신 셈이다. 사진을 보는 순간 정말 아까웠고 아주 원칙적인 판단은 아니지만 항암치료를 해서 효과가 좋으면 나중에 수술을 고려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욕심이 들었다. 환자에게 처음부터 너무 많은 불안과 절망을 주어서도 안되지만 과하게 희망을..

진단서를 작성하며

진단서 내 이름으로 외래를 처음 개설하기 전날밤, 얼마나 설레었던가! 명실상부한 전문의가 된 기분이었다. 외래는 입원환자 보는 것과는 다르니 환자를 보면서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예습을 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EMR을 열었다. 엥, 왠 진단서 발급을 요청하는 사람이 이리 많은고? 정작 외래에는 환자가 아닌 보험회사 직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고 보험회사마다 다양한 형식의 진단서, 진료확인서, 소견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보험 회사에서 요청하는 정보는 여러 모로 다양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수술 후 암세포가 확인되었는지, 병기와 현재 상태는 어떠한지, 치료 방법은 입원인지 외래인지, 입원이라면 낮병원인지 아닌지, 치료 약제는 무엇이었으며 주기는 얼마 간격인지, 치료를 중단하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