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가끔은 환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슬기엄마 2011. 2. 27. 11:23

가끔은 환자와 즐거운 시간보내기

 

호지킨병이 완치되지 않고 자꾸 말썽을 피우며 재발하는 스물 여섯살의 김양.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예쁜 눈, 고운 피부, 날씬한(사실은 매우 마른) 몸매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내가 처음 본 그녀는 자기만큼 예쁜 글씨로 자그마한 다이어리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 내용을 훔쳐보지는 않았지만 암튼 자꾸 눈이 가는 다이어리였다. 매일 회진을 갈 때마다 그녀는 뭔가를 적고 있거나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글씨와 그림이 너무 궁금했고 그녀의 다이어리 곳곳에 그녀가 그린 예쁜 마스코트 그림이 너무 예뻐서, 급기야 내가 가지고 있던 펜 중에 제일 좋은 하이테크펜을 그녀에게 주며 이거 선물이니까 나 그려달라고 떼를 썼다. 예쁘지만 새침떼기 그녀는 5일짜리 항암치료를 하고 떠나는 날까지 날 그려주지 않았고 훌쩍 퇴원해버렸다. 나도 파트가 바뀌고 서운한 마음조차 다 잊어버린 어느 날, 회진을 돌고 병실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김양이었다. 왜 내 그림 그려주지 않았냐며 투정부터 부리자, 김양은 , 제 그림 못 받으셨어요? 간호사언니에게 맡기고 퇴원했는데선생님 이름을 몰라서 *** 선생님 파트에 있는 선생님께 전해달라고 했거든요…’ 그녀도 서운한 눈치다. 다음날 같은 방 회진을 가니 그녀가 본인이 직접 만든 것이 분명한 작은 비닐포장꾸러미를 내민다. 일회용 스킨, 로션, 카드, 그리고 핸드폰 줄이 예쁘게 포장된 선물꾸러미였다. 피부트러블로 지저분한 내 얼굴을 보며 그녀는 이거 바르시고 고현정도 울고갈, 이영애도 탐내고 갈, 백옥 같은 피부를 기원해주었다. 난 책상서랍을 뒤져 각종 항암제 이름이 새겨져있는 볼펜, 형광펜, 수첩, 메모지, 포스티잇 등의 문구류를 빵집 종이봉투에 잔뜩 챙겨서 김양의 어머니께 전달했다. 직접 주기 쑥쓰러워서

 

70세 박씨 할머니는 다발성 골수종으로 2년 이상 고생하시고도 병이 잘 조절되지 않아 여러모로 고생이 많으셨다. 최근에는 정신도 흐려지시고 bed-ridden 상태로 거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지만 독성도 심하지만 그만큼 효과도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항암치료를 한차례 한 다음에 신장 수치도 정상화되고 정신도 매우 또렷해지시고 병동을 천천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어 퇴원하실 수 있게 되었다. 항암치료의 승리였다. 그러나 며칠 후 할머니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답답증으로 응급실로 오셨고 오던 날 밤부터 제발 집에 가게 해달라고, 병원에 못있겠다고 아주 똥고집을 부리셨다. 며칠 잠을 제대로 못자니 섬망도 동반되고 할머니는 잠못자는 고통이 얼마나 심한줄 아냐며 나를 붙잡고 우셨다. 교수님은 단호하셨다. ‘오늘부터 2차 항암치료 하자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떠나시면 그만이지만, 그 다음에 할머니를 설득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할머니. 나는 그렇게 가고 싶으시면 나 아이스크림 한 개만 사다주고 가세요. 저 이따가 점심 먹고 올 테니까…’ 할머니에게 할 일을 주문하고 시간을 벌었다. 점심때 가서 할머니랑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병이랑 병원이랑 불편한 증상이랑과는 상관없는 다른 얘기를 하며 관심을 돌렸다. ‘할머니, 내일도 아이스크림 한 개만 더 사주세요라며 오후 회진을 마쳤다. 박씨 할머니, 4일짜리 항암치료 잘 받으셨고 컨디션이 더 많이 좋아지셨다.

 

간으로 전이된 4기 대장암 진단을 받은 56세 최씨 아줌마. 병기로 치면 4기지만 일단 대장과 간 일부를 절제하여 눈에 보이는 병은 다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셨다. 물론 재발가능성은 꽤 높지만 대장암의 특성상 간으로 전이된 부분까지 다 수술하는 것이 생존율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입증되어 있다니 배를 가로로 세로로 긋는 큰 상처를 감수하고 수술을 받았다. 결혼한 첫 딸이 아들을 낳아 이제 그녀는 할머니가 되었지만 수술을 하고도 별 후유증이 없고 아직도 자기가 암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있다. 이렇게 컨디션이 좋고 멀쩡한데 꼭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냐며 의료진에게 반문하지만 사실 재발 가능성이 높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내내 불안해한다. 병원에 오면 불안과 우울함이 더 심해진다는 그녀. 성당을 다닌다고 하길래 그럼 묵주기도를 하세요. 하루에 10단씩. 입원하는 동안에는 내가 도움을 주고 싶은 누군가를 지향하며 하루에 10단씩 기도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오늘은 저를 위해서 묵주기도 10단 해주세요. 이따 오후회진 때 와서 확인하겠습니다.’ 암환자들은 누구나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불안, 우울, 적응의 어려움을 경험한다. 나는 암환자에 대한 정신과 진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정신과와 적극적으로 협진하여 환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하지만 아직까지 많은 환자들이 정신과 협진이라는 용어 자체에 매우 민감하고, 자신이 정신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정신과 진료를 거절한다. 환자가 정신과 협진을 거절하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어줍잖은 상담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종교적 심성이 강해보이는 그녀를 위해 난 기도를 주문했고, 뻔뻔하게 나를 위한 기도까지 부탁했다. 할일이 생긴 그녀는 침상에 반듯이 앉아 열심히 기도했고 날 볼때마다 선생님을 위해 일주일에 한번은 기도하고 있어요. 좋은 의사선생님이 되시라고…’ 말해준다. 파트가 바뀐 다음에도 병실에서 가끔은 외래 진료실 복도에서 만나는 그녀는 조금씩 수척해지고 기운없어 보이지만 표정은 많이 맑아졌다. 그녀의 기도 덕분에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더 노력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항암치료 중인 고등학생에서 영어단어 20개를 과제로 주고 오후 회진때 단어시험보기, 백혈병을 진단받기 전 의전원 시험 준비중이었다는 대학생에게 백혈병의 분자유전적 특성에 대한 영어논문을 주며 예후인자에 해당하는 유전자 외우게 하기, 매일 오락만 하는 총각에게 독서한 책에 대해 짧게 요약해서 발표하기, 노트북이 있는 환자들에게 영화 파일을 주고 영화를 보고 느낀점 말하기, 살이 찌고 혈당이 오르는데 인슐린은 죽어도 안맞겠다는 할아버지에게 만보기를 사오게 해서 병원에서 하루에 만보씩 걷게 하고 다음날 만보기 확인하기 뭐 그런 것들이 내가 회진시간을 이용해서 환자들과 즐거운 시간만들기에 가끔씩 사용하는 아이템들이다. 내가 우울하고 힘들 땐 하기 어렵다. 환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면 나도 즐거워야 하는데, 나도 요즘엔 별로 유쾌하지 않다보니 이벤트를 꾸며보기가 어렵다.

 

입원 환자들은 대부분 쉽게 회복되기 어려운 컨디션이다. 외래로 통원치료를 받지 못하고 입원하게 되는 그들은 정서적으로도 많이 긴장되고 위축되어 있다. 그들에게 병원의 24시간은 매우 길고도 지루할 거란 생각에, 가끔 농담을 건네보기도 하고, 병이나 치료에 관련된 얘기가 아닌 다른 얘기를 하며 회진을 돌기도 한다. 아무리 아픈 몸을 치료하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무거우면 힘들 것 같아서 유쾌한 농담을 개발해서 반응을 평가해 보기도 한다. 나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고 웃게 되는 환자가 있으면 난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본다. 그들이 나의 전략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면 나도 신이 나니까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에도 집에 가지 못하고 병원에서 절박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들에게 몸과 마음이 즐거운 뭔가로 함께 할 게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