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45

다른 길을 찾아봐

평범한 의사되기도 힘들다 작년 가을부터인것 같다. 나는 한달에 한번 꼴로 내가 4기 암을 진단받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여기 저기를 찔러 조직검사를 해 놓고 초조하게 검사결과를 기다리다가 결국 수술이 불가능한 4기 진단을 받고 곧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한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점검해 보거나 내 인생의 과제를 어디까지 수행했는지 미처 돌이켜볼 틈도 없이 항암치료가 시작된다. 꿈 속인데도 항암제가 혈관을 타고 들어가는 느낌, 명치가 아리한 느낌, 구역감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 이런 감각이 매우 예민하게 살아있어 식은 땀을 흘리며 깬다. 일어나서 흠뻑 젖은 베게를 보며 내가 항암치료 중이라 땀을 많이 흘리는건가, 병원으로 향하는 내가 과연 출근을 하러가는 건가, 항암제를 맞으러 가는건가 한참 헷갈릴 정..

조직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어댑터

조직과 개인을 연결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을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내 꿈은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대학교 4학년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여전히 우중충한 학교 건물, 한문 이름의 출석부, 교실 정중앙에 매달린 궁서체의 어색한 급훈, 그렇게 구리구리한 학교 안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아이들이 살고 있었고, 나는 한달의 실습기간 동안 그들과 신나고도 유쾌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무렵 아마 난생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요즘 연애하니? 예뻐지는 것 같다”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아마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예뻐졌던 시기였나 보다. 끝없는 나락 속에 떨어진 자존심, 존재감없는 1년차 주치의 시절을 보내며 몸과 마음이 지쳐가던 11월, 나는 한 3년차 선생님을 만나 기사회생..

어쩜 저런 의사가 있나/어쩜 저런 환자가 있나

일요일 오후 나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논문의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병원에 남아 있다. 주말이나 되어야 한숨 돌리고 내 일을 챙기게 된다. 나이가 먹어서인지 워밍업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내 고민이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었더라’ 리듬을 찾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이제 겨우 집중할 수 있게 되었는데 병동에서 전화가 온다. 어떤 환자의 보호자가 **** 교수님 담당 fellow를 찾는다는 것이다. 환자 얼굴에 피부 병변이 생겼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하는지 상의하고 싶다는 것이다. 병동 간호사는 피부 병변이면 직접 보지 않고 판단하기 어려우니 응급실이라도 내원하시는게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도 꼭 의사랑 통화를 하게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리 사소한 변화라도 환자와 가족들은 불안할 수 있겠지…’ 병동..

의사가 환자되면, 그냥 '환자'다

내가 의대생, 레지던트일 때는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던 선생님이 나의 환자가 된다면? 그래서 그의 문제를 진단하고 나의 실력과 재능으로 수술을 하거나 술기를 시행하여 증상을 호전시키고 완치시킬 수 있다면? 정말 뿌듯할 것 같다. 선생님도 당신 제자가 그만큼 능력있는 의사가 되었으니 스승으로서 뿌듯할 것이고, 나도 예전에는 선생님 눈도 못 마주치는 햇병아리였는데 당신 몸에 손을 대고 이곳 저곳을 주무르며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는 의사가 되었으니 솔직히 으쓱할 것같다. 생각만 해도 우쭐해진다. 그러나 나는 종양내과 의사라서 그럴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내가 보는 환자 중에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경우는 수술 후 재발방지를 위한 보조항암요법을 받는 환자들인데, 이들이 완치를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

부정수소외래

우리에게도 부정수소외래, 혹은 보호자 외래가 있어야 하나? 가끔 눈을 떼기 어렵게 내 마음을 낚아채는 책들이 있다. 재미로, 감동으로 혹은 지식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는 그런 책을 만나면 여러권 사서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하며 내가 느낀 기쁨을 공유하고 싶어하는 편인데 일본 병리의사로 알려진 가이도 다케루가 쓴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이라는 책은 진짜 재미있어서 주위에 웃음이 필요한 의사들에게 선물하곤 했다. 반응은 꽤 좋은 편. 단 이 책의 진짜 재미는 병원 생활을 해본 의사가 가장 절묘하게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다구치는 신경과에서 분리되어 나온 ‘부정수소외래(不定愁訴外來, indefinite complaint outpatient clinic)의 만년강사인데 부정수소외래를 찾는..

의사가 청진을 하면서 꼭 들어야 할 소리

의사가 청진을 하면서 꼭 들어야 할 소리 “폐암 환자를 볼 때 예전에는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호흡음에 변화가 있는지, 심장 잡음은 없는지 주의깊게 듣는게 중요했지만 요즘 의사는 그것 외에도 2가지 소리를 더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지갑의 두께를 짐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폐암에 대한 신약 표적치료제를 자기 부담으로 지불하고 쓸 여유가 되는지 미리 파악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에게 비싼 약을 추천하면 환자가 너무나 속상해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환자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의사가 제안하는 고가의 항암제를 쓰겠다고 선뜻 대답했다가 몇 년 지난 다음에 심사평가원에 고소를 할만한 사람은 아닌지 미리 예측할 수 있어야 의사 생활 오래 할 수 있습니다” (국립암센터 이진수 원..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떄가 있습니다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녀들은 뇌종양으로 수술, 방사선치료, 감마나이프, 항암치료를 다 했지만, 단 한번도 치료에 반응하지 않았다. MRI를 찍을 때마다 나빠지기만 했다. 상당히 공격적인 치료법을 구사하신다는 우리 교수님도 오늘 아침 MRI를 보시더니 ‘이제 그만 하자’ 하셨다. 의식은 멀쩡한데 뇌간에 병이 있는 그녀는 자발호흡이 잘 안되는게 문제다. 자기도 모르게 자꾸 이산화탄소가 쌓여서 의식이 흐려지는 일이 반복되고 그러면서 폐렴이 동반되곤 했다. 뇌간에 병이 있으니 호흡도 문제고 삼키는 기능도 안되서 침도 삼키지 못할 정도다. 그래서 결국 위에 튜브를 연결해 인공 영양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글씨를 써서 의사도 전달하고 와이브로 노트북으로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들으며 ..

늙어서 몸 아픈것도 힘든데 돈 없는 것은 더 서럽고

늙어서 몸 아픈 것도 힘든데 돈 없는 것은 더 서럽고 진행성 위암을 진단받고 항암치료를 받으신 66세 할아버지. 첫번째 항암치료 이후 1년 이상 병이 진행하지 않고 유지하셨으니, 평균 여명은 넘기셨다. 속이 불편한 증상이 조금씩 악화되고 복부 CT에서도 위에서 십이지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의 위벽이 점점 더 두꺼워지고 있는게 보였지만 할아버지가 항암치료를 원치 않으시고 입원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셔서 외래에서 경과관찰 하고 있었다. 식사량이 줄고 몸무게도 너무 많이 빠져서 항암치료를 다시 하시면 어떨까 여쭤보니 할아버지는 검사 많이 안하고 입원 안하면서 항암치료를 하면 하시겠다고 한다. 매주 외래 주사실에서 항암제를 맞고 가실 수 있는 방법으로 치료를 시작하였고 할아버지의 전신상태는 ECOG PS 1. 병에 ..

나를 위한 배려

나를 위한 배려 2002년 나는 본과 3학년 실습학생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새벽에 헬스클럽을 다녔는데 병원 실습이 시작되니 과마다 스케줄이 달라 정기적인 운동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 무렵 마라톤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일산에 사는 나는 호수공원 마라톤클럽에 참여하기로 하였고 주말이면 일산 호수공원을 비롯해 다양한 달리기 코스를 개발해 뛰기 시작하였다. 운동이라는게 한번 빠져들면 약간 중독이 되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난 주말이면 몸 컨디션을 만들어 서너시간씩 달리기 연습을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일요일 아침 6시에 호수공원에 나가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연습하여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에게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끝까지 다 뛰었다는 것 ..

평생 공부를 한다는 것은

공부를 한다는 것은 나는 오늘 우연히 모 교수님이 당신 혼자 공부하시며 정리해둔 파일을 하나 입수했다. 당신이 공부하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림, 사진, 메모들을 파워포인트에 정리해두셨다. 파워포인트 파일제목도 시원찮고, 편집도 안한 막파일이라 흰색 바탕에 통일된 글자체 한가지, 그리고 PDF file에서 복사한 그림들, 뭔가 연결된 흐름으로 메모와 사진과 그림이 이어지고 있는 듯 하지만 나로서는 그 흐름을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선생님은 파워포인트 한장 한장마다 아랫쪽에 출처를 명시하셨다. 저널이름, 발행연도, 페이지까지 소상이 기록해 놓으셔서 난 전자도서관에 들어가 저널 뒤지기를 시작했다. 아쉽게도 저자이름을 기록해놓지 않아 저널을 찾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마치 남들의 눈을 피해 도둑질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