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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내 감이 틀렸군요

전이성 유방암 환자는항암 치료를 할 경우 2주기 (6주) 혹은 3주기 (9주) 에 한번씩호르몬 치료를 할 경우는 3개월 (12주) 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영상검사를 하면서 치료의 지속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사진을 찍어서 안정병변(stable disease)이냐 질병진행(disease progression) 이냐를 판단한 후이전 치료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아니면 약제를 바꿀지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안정병변이냐 질병진행이냐를 결정하는 것은국제적인 판정기준에 따른다.확실하게 나빠졌다는 기준에 부합하기 어려우면 일단 안정병변에 준해 치료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조금 나빠졌다고 약제를 빨리 바꾸는 것이 궁극적으로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약제를 자꾸 바꾸면 나중에 쓸 약이 없어지게 된다.약효가 조금 늦게 나타날 ..

러브 레터 아니어도 반가운 편지

병원에 정을 못 붙이고쓸쓸한 마음으로 병동을 헤매던 전공의 1년차 말.감염내과를 돌던 나를 '사랑'으로 거두어주신 선생님이 계셨다.겨울의 길목에 접어들던 당시일요일 회진 때면 따뜻하고도 고급스러운 카페라떼 커피를 사가지고 병동으로 오셨다.일요일까지 긴장하며 회진준비 하지 말라고교수님들 안계시니 우리끼리 마음 편히 돌자고,자기 오기 전에 미리 프리회진 안 돌아도 된다고 하셨다.선생님이랑 같이 EMR 보면서 여유있게 환자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도 많이 하고항생제에 대해서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문제해결을 못해 낑낑거릴 때 윗사람이라고 너무 어려워하지 않고그냥 전화할 수 있었다.선생님은 늘 친절히 가르쳐주셨고, 또 내가 환자 파악이 안되서 보고를 잘 못하면환자를 보러 병동에 와 주시기도 했다.밤 늦은 시간에..

우울한 면담

그녀를 처음 만난건 약 4년전. 처음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때이다. 겨드랑이 림프절까지 병이 진행되어서당장 수술하지 않고 수술 전 항암치료를 먼저 했었다. 그때 우리병원에서 진행중인 임상연구가 있었는데 당시 펠로우였던 나는 그 임상연구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환자 면담을 했던 기억이 난다. 유방암을 처음 진단받으면 환자 당사자나 가족들의 충격과 불안은 이루말 할 수 없지만의사인 나는 솔직히 큰 부담은 아니다.조기 유방암에 대한 설명예후와 성적에 대한 데이터가 있고설명해야 할 부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성의껏 설명하고질문에 답하면 된다. 그때는 내가 주치의가 아니었으니임상연구 설명을 하고 첫 치료를 받고 퇴원한 이후 뵌 적이 없다. 그를 다시 만난 건 올 1월.허리 통증이 심해져서 다른 병원에 갔다가 유방암 ..

사회생활 중 맺는 인간관계에 대해

가족은 일차집단직장은 이차집단가족은 웬수같아도 궁극적으로 내편이 되어주고직장에서 만나는 사람은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많은 일을 같이 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내 편이 되기 어렵다. 무관심하면 다행, 헤꼬지 안하면 다행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알고 지내는 사람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만 (역 피라미드처럼)정작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혹은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싶은 사람은 점점 드물어진다 (피라미드 꼭대기처럼)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 저녁에는항암요법연구회 유방암 분과 모임이라는게 있다.각 병원에서 유방암 진료를 담당하시는 선생님들이 모이는 자리이며, 병원간, 병원별로 진행되는 공동의 임상연구에 대해, 유방암 진료와 관련한 현안 등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이다. 일종의 정규적인 '회의'인 셈이..

MRI 를 찍고

생전 처음으로 MRI를 찍어 보았다. 전이성 유방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1차 치료약제인 탁솔과 탁솔의 구조와 성질은 유사하지만 부작용을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개발된 새로운 NK105 라는 약의 효과를 비교하는 3상 임상연구가 있는데그 연구에 등록이 되면 뇌 MRI를 의무적으로 찍어야 한다.전이성 유방암 환자들은 비록 4기라 하더라도 오래 사는 환자가 많다.생존 기간이 길다보니 다른 암에 비해 상대적으로 뇌전이가 되는 환자들 비율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그래서 이 연구는 아예 처음부터 뇌 MRI를 찍어 뇌 상태를 확인하고 치료를 시작하게 되어 있는 프로토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연구를 진행하는 일본 본사에 우리 병원에서 찍은 뇌 MRI 를 보내서 퀄리티를 평가받아야 하는 단계가 있는데예전에 한번 했었다가최..

영양제라고 다 좋은게 아닐 수도 있다

아세틸 카르니틴 (Acetyl-L-Carnitine) 이라는 약이 유방암 수술 후 투여하는 탁솔/탁소텔로 인해 발생하는 신경병증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3상 임상연구 결과가 이번달 JCO에 발표되었다. (첨부파일 참조) 탁솔/탁소텔은 신경병증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항암 약물이다. 약을 중단하면 증상은 대부분 호전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투여 후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신경손상에 의한 증상이 남아 있는 경우가 흔하다. 암은 완치가 되었는데 정작 삶의 질은 나쁘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수술 전후 4-6회 정도 제한되게 약을 투여하는 경우에도 이런 부작용이 심각한데 전이성 유방암 환자에서는 독성을 견디는 한에서 가능한 오래 쓰는 것이 약물 투여의 원칙이다 보니 환자들의 불편감과 고통이 이만저..

그땐 그랬지

전공의 4년차가 되고 인턴, 일년차들의 시간표를 배치하는게 중립적이거나 임의적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시간표를 짜는 동기들을 보며이 녀석들이 사심을 품고 시간표를 짠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예를 들면 어떤 선생님 밑에는 어떤 레지던트를 배치할 때 윗사람의 성향을 고려한 원칙이 있는 것 같았다. 사회생활의 일환이니 이해해 본다. 이쁜 여자 레지던트> (나이가 좀 많아도) 일 잘하고 똘똘한 레지던트> 말 잘 듣는 현역 레지던트 뭐 이런 순서로 레지던트 선호도가 갈리는 것 같았다.그걸 보며 난 깨달았다.난 레지던트를 배치하는 매번, 그 모든 순서에서 제일 후순위였다는 걸.날 아랫년차로 받아준 윗년차 선생님들이 성격이 좋고 늙은 아줌마 레지던트인 나를 감당할만한 너그러운 사람이었거나..

나의 비겁함

그녀를 만나러 가고 싶지 않았다.뭐라고 말해야 할지...그동안 그녀에게 모진 말, 못할 말 많이 했는데이제 더 이상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그래서 협진이 났는데도 가서 만나지 않고 EMR로 답신만 썼다.난 도저히 그녀를 다시 만날 용기가 없었다.나의 비겁함... 그녀는 유방암을 시작으로 지난 2년 동안 세번의 암을 진단받았다.유방암 진단 1년후 갑상선암 그리고 1년 후 백혈병 첨에 유방암은 2기초인 줄 알았다.겨드랑이 림프절도 없었다.그래서 PET 등과 같은 영상검사도 하지 않고 바로 수술을 하였다.(원래 임상적으로 겨드랑이 림프절이 의심되지 않는 조기유방암은 초음파검사, mammo 만 검사하고 수술하는게 원칙이다.) 당시 임상연구가 있었다. 일종의 골다공증 치료의 목적으로 개발된 Denosumab 이..

4년 후 환급신청

HER2 양성 유방암 환자 중 종양의 크기가 1cm 초과되는 환자들은수술 후 항암치료를 마치고 나서 1년간 표적치료제인 허셉틴을 1년간 맞는다.우리나라에서 수술 후 허셉틴이 보험으로 인정이 된 건 2010년 10월 1일이다. 그 날을 기점으로 항암치료가 끝난지 6개월이 안된 사람은 이어서 허셉틴을 보험으로 맞을 수 있었다. 그보다 하루라도 더 일찍 항암치료를 끝낸 사람은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당시 외래에 찾아와서 항의하고 환자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몇일 차이가 대수냐고. 나도 그들 심정에 충분히 동의하고 동조하지만한번 만들어진 법과 제도는 나같은 일개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2009년부터 소문이 있었다. 허셉틴이 곧 보험이 될 거라는.유방암을 진료하는 종양내과 의사들은 허셉..

반전 - 삶에 대한 자세

사람도병원도세상도다 싫고다 버리고 싶고다 털고 떠나버리고 싶어도눈앞에 있는 환자를 진료하는 하루하루의 일상은더 이상 내 고민을 진척하지 못하게 만든다. 환자를 본다는 것은 내 인생을, 내 고민을 한다는 미명하에 건성건성할 수 없는 일이다.그들은 나에게 목숨을 걸고 득이 될 수도 있지만 독이 될 수도 있는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매 순간 울렁거림과 어지러움증,손발저림과 통증과 싸우며삶의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죽을 힘을 다해 애쓰고 있다.그런 그들을 앞에 놓고 내 고민을 제대로 할 시간이 없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다보니 원칙에 맞지 않는 일형평성에 맞지 않는 프로세스 비효율적인 조직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그런 것을 지적할 여유가 없다. 문제가 있을 때 허심탄회하게 토론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