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2 양성 유방암 환자 중
종양의 크기가 1cm 초과되는 환자들은
수술 후 항암치료를 마치고 나서 1년간 표적치료제인 허셉틴을 1년간 맞는다.
우리나라에서 수술 후 허셉틴이 보험으로 인정이 된 건 2010년 10월 1일이다.
그 날을 기점으로
항암치료가 끝난지 6개월이 안된 사람은 이어서 허셉틴을 보험으로 맞을 수 있었다.
그보다 하루라도 더 일찍 항암치료를 끝낸 사람은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당시 외래에 찾아와서 항의하고 환자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몇일 차이가 대수냐고.
나도 그들 심정에 충분히 동의하고 동조하지만
한번 만들어진 법과 제도는 나같은 일개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2009년부터 소문이 있었다.
허셉틴이 곧 보험이 될 거라는.
유방암을 진료하는 종양내과 의사들은 허셉틴의 우월성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보험이 안되서 몇 천만원이 들더라도
HER2 양성이면 허셉틴을 맞는게 생존율을 향상키시고 재발율을 낮추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런 개인 의견을 말할 수 없었다.
아직 제도적으로 허용된 약이 아니므로.
(지금도 마찬가지다. 좋은 약들이 많이 개발되어 나오고 있지만 말할 수 없다. 비보험이 되면 왠만한 약은 다 한달에 400-500만원이 넘기 때문에 아예 그런 말을 안꺼내는게 낫다. 그냥 모르쇠로 일관하는게 낫다.)
다행히도
2009년 당시 우리나라 몇개 기관에서
수술 후 허셉틴을 쓰는게 도움이 된다고 알려진 환자 그룹을 대상으로 한 임상연구가 시작되었다.
당시 표준 치료인 허셉틴 단독군 (우리나라에서는 표준이 아니었지만),
타이커브 단독군,
허셉틴 쓰다가 타이커브로 바꾸는 군,
허셉틴과 타이커브를 처음부터 끝까지 1년간 같이 쓰는 군
이렇게 4군으로 대상으로 환자를 배정하여 치료를 하는 임상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허셉틴이 보험이 안되던 시절에 허셉틴을 무료로 1년간 다 맞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다른 HER2 표적치료제인 타이커를 병용하는 연구이니
환자에게 임상연구를 권하는 의사의 입장에서는 꺼릴께 별로 없고 환자에서 유리한 점이 훨씬 더 많은 연구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이 임상연구를 진행하면서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엄청나게 많은 환자를 등록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 유방암 임상연구 현황에 깜짝 놀랐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절실했던 약이었다.
환자에게 이 임상연구를 제대로 설명하기가 여러모로 힘들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허셉틴이라는 약이
이미 세계적으로 그 효능에 대해서는 입증이 되었는데
거기에 다른 약을 또 더하는 연구라는 점
4군 중에 한 군으로 배정되는데
어쩌고 저쩌고
그냥 임상연구 안하고 보험대로 항암치료만 하고 뚝딱 치료를 끝내버리면
환자들은 자신이 HER2 양성인지 음성인지 알 길도 없고
- 그런 걸 검사한다는 것도 잘 모르는 환자가 많을테니까 -
안다 하더라도 보험법과 경제적인 문제가 겹쳐 현실적으로 약을 쓰기가 어려운 시절이었으므로
의사도 입 아프게 시간들여가며 별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당시 그 임상연구에 우리나라 환자들의 등록률이 높았다는 것은
의사로서 그 약의 중요성과 환자 이득이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종양내과 의사들이 절실한 마음으로 환자를 등록시키기 위해 애를 쓴 결과였다.
그런데
한 환자는
이런 설명을 듣고
이건 임상연구이니 자기는 안하겠다고,
자기는 실험실 쥐가 아니라고,
내가 그런 실험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표준치료인 허셉틴을 맞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
당시 허셉틴을 수술 후 보조요법으로 1년간 쓰는 것은 보험이 아니었으니
환자는 보험이 되지 않더라도 자기가 돈을 다 내고 맞겠다고 하였다.
당시 이러한 정황을 꼼꼼하게 모두 경과기록으로 남기고
환자의 자필서명도 받아놓고
주치의 설명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 환자는 1년간 비보험으로 허셉틴을 맞았다. 아마도 5000-6000만원 정도 들었을 것이다.
4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재발없이 잘 지내고 있다.
허셉틴을 투여하기 전 시대에는
HER2 양성 유방암의 재발이 평균 2년을 기점으로 50% 이상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3기 말로 병기가 높았던 그녀가 아직까지 재발을 안한 것은 허셉틴 덕이 컸다고 볼 수 있다.
4년이 지난 이 시점에
그녀는 보험이 안되는 약으로 자기를 치료했다며 심평원에 진료비 환불 청구를 했다.
당시 허셉틴은 인정비급여라든가 임의비급여라든가 하는 규정 자체에 들어가 있는 약이 아니었다.
(인정비급여 : 급여가 안되 비싸지만 합법적인거, 임의비급여 : 급여도 안되고 불법인거.)
어쨋든 보험이 안되는 치료를 했으니 물어내라는 이야기다.
병원은 환자 민원이 발생기면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그 케이스만 합의하여 넘어가는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좋지 않은 일로 병원 이름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 더 손해다.
그러나 이 사실이 만약 알려지고 환우회 등을 통해 퍼지게 되면, 비슷한 사례의 환자들이 다 자기돈도 돌려달라고 민원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자의 주장을 들어주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청구심판절차를 밟기로 했다.
어이없는 곳에서
힘을 빼게 생겼다.
이런 일을 당하면
환자보는 의사질, 그만 두고 싶다.
솔직히 증오심이 생긴다.
대개의 의사는
왠만하면 환자 중심으로 해 주고 싶다.
환자는 아픈 사람이니까 조금이라도 환자편에 유리하게 결정을 해 주고 싶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절대 승복해서는 안된다.
이건 완전히 도덕적 해이 (Moral hazard) 현상이다.
환자 개인의 본성이라기 보다는 시스템의 오류를 교정하지 않는 정부의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상은
어제 유방암 분과모임에서 했던 토론이며
어느 병원에서 현재 진행중인 사건이다.
우리병원은 아니라 다행이다.
내가 그 총대를 매지 않게 되서 다행이라는 비겁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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