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그땐 그랬지

슬기엄마 2013. 7. 2. 22:46


전공의 4년차가 되고  

인턴, 일년차들의 시간표를 배치하는게 

중립적이거나 임의적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시간표를 짜는 동기들을 보며

이 녀석들이 사심을 품고 시간표를 짠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선생님 밑에는 어떤 레지던트를 배치할 때 

윗사람의 성향을 고려한 원칙이 있는 것 같았다.  

사회생활의 일환이니 이해해 본다.


이쁜 여자 레지던트> (나이가 좀 많아도) 일 잘하고 똘똘한 레지던트> 말 잘 듣는 현역 레지던트 

뭐 이런 순서로 레지던트 선호도가 갈리는 것 같았다.

그걸 보며 난 깨달았다.

난 레지던트를 배치하는 매번, 그 모든 순서에서 제일 후순위였다는 걸.

날 아랫년차로 받아준 윗년차 선생님들이 성격이 좋고 

늙은 아줌마 레지던트인 나를 감당할만한 너그러운 사람이었거나

사다리 타다가 밀린 운이 나쁜 사람이었다는 걸.

과내에 커플이 많은 건 괜한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도 하고 같이 환자도 열심히 보면서 우정도 쌓고 애정도 쌓고 사랑도 쌓고...

뭐 그런 것이 인생이겠지.

그런데 8주 내내, 아줌마 레지던트랑 일해야 하는 윗 선생님들은 얼마나 재미없고 속이 터졌을까...

일도 빠릿빠릿 제대로 못하고

눈치도 별로 없고

이쁜 것도 아니고

회진 때 대답하는 거 보면 똑똑한 것도 아니고... 

이 자리를 빌어 나를 아랫년차로 데리고 일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라도 올려야 할 판이다. 


레지던트 가운은 왜 그리 통풍이 안되는지, 늘 땀이 줄줄.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들을 만날 때면 마스크를 착용하고 환자들과 이야기를 하지만

이미 나의 마스크는 가운 속에서 적당히 너덜너덜 더러워진 상태.

CPR 한번 하고 나면 온몸이 흠뻑 젖지만 씻을 틈이 없으니 그대로 땀을 말리고 다시 일한다.

항상 머리는 기름기가 좔좔, 씻지 못한 몸에서는 쉰내가 풀풀. 생각만 해도 웩이다. 

몇일전 환자명단까지 버리지 못하고 다 책받침에 철해서 다닌다. 생각이 안날까봐 적어놓은 노트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참 폼이 안난다. 쯧쯧.

내가 회진 돌 때는 까만 볼펜, 

선생님이 지시하신 사항은 파란 볼펜, 

그날 꼭 해야 하는 일은 빨간 볼펜, 

급하게 챙겨야 할 일은 형광펜, 

이동식 문방구가 가운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 각종 필기도구와 함께 환자 입속 들여다 보는 펜라이트, 잘 써먹지도 않는 해머, 구겨진 식권 등이 가운 윗주머니가 불룩 차 있다. 쯧쯧. 


이과 저과 돌아다니면서 갖춰야 하는 중요한 덕목은 비굴한 자세. 

비굴하게 부탁해야 성공가능성이 높다. 괜히 큰 소리치고 주장하다간 내 스케줄 밀린다. 최대한 비글한 자세로 환자를 위해 꼭 좀 부탁한다는 멘트를 사교적으로 할 수 있어야 그날의 푸쉬가 완성된다. 그 때는 그런 것들이 비합리적이라고 씩씩거리며 분노하기 보다는 나는 또 푸쉬에 성공했다는 만족감으로 뿌듯했던 시절이다. 그런 자세로 인턴성적 1등을 받았던 것 같다. 


수련체계와 교육체계의 비합리성에 때론 욱 하곤 했지만, 난 결국 그 시스템에서 성장하였고 그 공과 실을 피부로 체득하면서 오늘의 내가 되었다. 늙은 아줌마 레지던트를 내치지 않고 꾸역꾸역 뒤쳐지지 않게 쫒아가며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선생님들이 계셔서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의사로 성장한 나는이제 나의 후배들이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하는 위치가 되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비실비실 힘없이 병동을 헤매는 전공의들을 불러 밥도 사주고 유방암도 가르쳐주고 통증 조절도 가르쳐주면서 내 곁을 스쳐지나가는 후배들을 한명 한명 가르쳐 줄 수 있는 열의를 잃지 말아야겠다. 애써서 가르쳐주면 다른 파트로 가버린다고 투덜거리지 말지어다. 의사를 만드는 것은 시스템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니까. 


박세준 선생님, 선생님의 일기를 보니 저도 옛날 생각이 났어요. 

그래도 그때가 그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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