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어쩌면 인생은

어제는 우리 병원 진단검사의학과에서 일하는 동기를 만났습니다.토요일이지만 병원 내 각 검사실을 둘러보며 문제는 없는지 체크하는 일을 하는 당직이라고 하더군요.진단검사의학과 의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환자들은 알 수 없습니다. 임상의사인 저도 사실 잘 모릅니다. 그 친구는 아주 성격이 꼼꼼하고, 자기가 맡은 일을 목숨 걸고(!) 열심히, 충실히 하는 녀석입니다.자기가 검체를 다루는 그 모든 과정에서 한 치의 오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섬세하게 신경쓰고 확인하며 일합니다. 그것이 환자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는 믿음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당장 눈 앞에서 환자를 보지 않아도 자기가 리포트하는 그 결과 하나하나가 환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칠 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 흔한 혈액검사 한번도 그 ..

희승이 치킨값 좀 보태주세요

희승이는 Ewing's sarcoma 로 항암치료 중인 고2 남학생입니다. 작년 8월에 병을 진단받고 다른 병원에서 항암치료랑 방사선치료를 받았습니다. 이 병은 항암치료과정이 특이합니다. 엄청 오래 치료하고 스케줄도 복잡하고 약도 엄청 독합니다. 한번 치료를 시작하면 1년 이상은 계속 치료를 하는거 같아요. 저는 이 병을 치료해 본 경험이 없어서 치료 과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뭏튼 엄청 힘든 병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희승이는 치료가 잘 안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척추로 척추로 병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요.이전에 치료받았던 병원에서는 약제 반응이 좋지 않고 자꾸 전이가 되니까앞으로 예후가 안 좋고 더 이상 항암치료를 하는게 큰 의미가 없다고 했었나 봐요.어찌어찌 해서 지금은 우리병원 소아청소년과에 입원해..

지금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난 천주교 신자지만 믿음이 강한 편이 아니다. 사실은 거의 나이롱 신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순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을 만나면 묵주반지에 의지해서 주의 기도를 열번 한다. 그것이 그를 위해 하는 나의 최대한의 노력이다. 나를 믿고 치료받았던 환자가 이제 퇴원도 할 수 없는 나쁜 컨디션이 되어 끙끙 거리며 밤을 뜬 눈으로 보낼 때 나는 그냥 기도를 할 뿐이다. 나의 기도로 뭔가가 좋아질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난 왠만하면 입원을 잘 안 시키는 편이라, 입원해 있는 환자들은 여기 저기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은 환자들이다. 그리고 항암치료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항암치료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외래에서 받는 경우가 많다. 입원을 하는 것 자체가 뭔가 컨디션이 안좋다는 것을..

호스피스 보험시대

내년부터 호스피스 행위에 수가가 붙어서 돈을 받을 수 있는 의료행위가 될 것 같다.수가가 잘 책정되서많은 병원이 적극적으로 호스피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아직까지 호스피스는 그 자체로는 수가가 매겨져 있지 않다. 환자를 위한 자원봉사 수준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이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는 전문적인 호스피스 프로그램이나 임종 관련 간호 등이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형편이다. 전문가도 많지 않다. 우리 병원의 경우호스피스 병동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각 과에서 호스피트 팀으로 협진을 의뢰하면 호스피스 전담 간호사가 환자를 방문하여 상황을 파악한다. (이 대목에서 호스피스 전담 의사가 있으면 좋지만 아직은 아쉬운 실정이다. 나도 아주 부분적으로만 활동하고 있는 형편이다.)간호사는 여러 차례 ..

러시아 할머니 홈런치심

72세 러시아 할머니. 2년 전에 러시아에서 난소암 수술하고 항암 치료를 하셨다는데 - 무슨 약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러시아 글씨를 영어식으로 읽어보면 taxol 이랑 carbo 랑 하신거 같다 - 항암치료 끝난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재발하신 것 같다. 애초부터 3기였으니 2년 안에 재발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난소암은 최초 재발이 6개월 전이냐 후냐가 예후에 중요하기 때문에 금방 재발한 할머니 난소암은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 난소암에서는 플라티넘 약제가 가장 중요한데, 이에 대한 감수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6개월을 잡는다. 최초 약제로 치료하고 끝난지 6개월이 지나서 재발을 하면 비교적 감수성이 남아있는 걸로 생각하고 같은 약을 다시 써도 다시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개념이다.플라티넘 저항..

생명력이란 무엇인가

방명록에 남긴 환자 어머니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환자였던 따님이 마지막에 남긴 편지를 같이 남겨주셨습니다. 존경하는 이수현 선생님: 제 딸 영민이는 전적으로 선생님의 전문가적 권위의 겉에 코팅된 측은지심에 자석처럼 끌리어 질병을 견디면서 승리하며 지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지요...!!! 환자가 어떻게 지내는가를 결정짓는것이 전적으로 주치의와 팀으로 움직이는 간호사들의 헌신적인 돌봄때문이었으며 그 어려운 길에 언제나 천사로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생동안 많은 순간 천사의 손길을 기다렸지만 종양내과에서 치료받으며 무수히 많은 천사들을 만나곤 했습니다. 딸 영민이는 전적으로 산생님을 신뢰하므로 충성으로 순응 했습니다. 진통제를 3단계로 처방받았으나 전혀 예상밖으로 가장 초기단계의 약으로 조절했지요! 처음부터..

역시 그녀는 강철 여인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강철여인이 있다. 그녀는 최초 유방암을 진단받고 치료했다가 7년만에 폐로 재발했는데 재발되어 치료한 지 6년째다. 그동안에는 폐에만 병이 있었는데 작년 말에 뇌로도 전이가 되었다. 자꾸 몸이 떨리는 증상이 있었는데 그게 뇌 병변에 의한 경기로 나타난 증상이었다는 사실을 MRI를 찍어보고서야 알았다. 한달 이상 증상이 있었는데 내가 그 증상이 경기인 줄 알아채지 못해서 검사를 좀 늦게 하게 되었다. 내가 사실 뇌신경학적 검사에 좀 약한 편이다. (한때 망치로 환자들 무릎, 팔꿈치 열심히 두들기고, 발바닥도 열심히 긁어보고, papiledema 를 본답시고 opthalmospope 도 살까 생각도 했었다. 어느새 그런 신체검사는 열심히 잘 안하는 사람이 되어 간다. 청진하고 장음 들어..

세포와 사회 사이에서

염색을 했는데이론상 핵에 염색될 줄 알았는데 세포질에 염색이 더 많이 된 걸로 나왔다.내가 생각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이리저리 고민을 해 본다.그동안 별로 연구가 많이 된 마커가 아니니 기존 연구를 다 믿을 수도 없고내 결과가 더 맞는 말이라는 주장을 하려면 추가 실험을 하거나 다른 확고한 이론을 찾아야 한다.구굴링을 하고 펍메드를 찾아 헤맨다.아무래도 이걸로는 미흡하다.추가 실험을 해 봐야겠다.그런데 돈이 없네?연구비를 따야겠다. 그럴려면 연구계획서를 써야 한다. 박터진다. SPSS를 돌려보니 별로 신통치않다. 뭐랑 뭐랑 연결해서 다시 분석을 해보면 좋겠는데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또 구글링이랑 펍메드 검색을 해 본다.비슷한 방법론을 쓴 동기들을 찾아본다.다른 과 누군가가 이런 쪽을..

이의제기도 하지 말라

언제인가 기억은 안나지만 작년 언젠가 내가 한 처방을 삭감한 심평원의 결정에 대해이의신청을 하였고 그것이 인정되어 삭감이 취소되고 환급을 받았던 날 진정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논문이 채택된것 보다 더 기뻤다. 이의신청을 하기 위해 내가 한 의료 행위가 의학적으로 적절하며 적법한지에 대해 증명해야 했고 이를 위해 수많은 논문과 관련 증거들을 명시하여 결국 인정을 받게 되었다. 환급받은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내가 자존심을 걸고 의사로서 일한다는 것, 다른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환자의 치료를 위해 노력한 결과에 대해 부당한 평가를 받았다는 것 때문에 난 이의제기를 한 것이다. 그렇게 이의제기를 하지 않으면 해당 조항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환자를 위해서 불리한 조항인데도 그냥 수용함으로써 궁극..

요양병원

이제 우리병원에 계속 입원해 계시는 것이 별로 의미없을 것 같아요. 집으로 가시거나 집 근처 요양병원을 알아봐서 글로 퇴원하세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 순순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환자는 단 한명도 없다. 다니던 병원 놔두고 왜 다른 병원으로 가란 말인가. 게다가 이제 컨디션도 별로 안 좋은데. 내 검사 기록, 의사의 소견, 여러 과 협진 결과 등 나의 병력과 관련된 모든 정보들이 다 여기 있는데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러나 나는 환자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상태가 더 나빠져도 우리 병원에 오시지 말고 거기서 임종하시라고 미리 말씀드려야 한다. 3차 의료기관은 임종하러 오는 곳이 아니니까. 나는 그렇게까지는 말을 잘 못한다. 계셔 보시다가 힘들면 오세요. 우유부단하게 그렇게 말하고 환자를 억지로 퇴원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