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말을 하면 딴 소리 하기 일쑤다.
당신 하고 싶은 말만 하신다.
당신 하고 싶은 데로 하신다.
저 멀리 전라도 작은 마을에 사시는 할머니는
항상 투덜투덜,
몇 시간씩 기차 타고 버스 갈아타고 서울 한번 오는데 얼마나 힘든지 아냐며,
백혈구 수치가 기준에 못 미쳐도 무조건 항암치료를 맞고 가겠다고 우기셨다.
최소한 호중구가 천개는 넘어야 항암치료를 시작할 수 있는데 할머니는 그런 나의 설명에는 막무가내다.
할머니랑 싸우다 지친 나는
호중구 몇백개 밖에 안되는데도 그냥 할머니에게 항암제를 처방한 적도 있다.
할머니 등살을 견딜 수 없었다.
자꾸 배가 아프다고 하셨다.
입원하며 진통제 용량 올리고 배 CT도 찍어보고 해야 하는데
왜 입원해야 하냐고
또 입원하고 나면 왜 또 검사하냐고
매번 태클이다.
자식들 돈으로 치료받는데 왜 이렇게 자꾸 검사하냐, 마약 진통제 중독되는거 아니냐, 왜 계속 치료하는데 안 좋아지냐,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신다.
아무리 시골 할머니라지만 나를 채근하는 이야기만 계속 하시니 나도 기분 별로 안 좋다.
항상 당신 맘대로, 당신 생각대로 해 오셨다.
그러나 두달전, 더 이상 효과적인 항암제가 없으니 그냥 지내시라고 외래에서 할머니를 돌려 보냈다. 진통제랑 소화제 그러 몇가지 상비약을 드리고, 두달 뒤에 오시라고 했다. 오늘이 그 두달째다.
어차피 항암치료 계획이 없어서
CT나 피검사도 없이
환자를 만났다.
외래 진료실에 들어온 할머니.
오늘은 왜 검사를 안하냐며 성화시다.
아이고,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나는 내심 할머니 치료 계획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 본다.
할머니랑 눈도 안 마주친 채로.
할머니는 내가 쳐다보지 않아도 당신 얘기를 계속 하신다.
산부인과에서 종양내과로,
종양내과에서 방사선 종양학과로
이과에서 저과로 자기를 내돌리는 걸 보니
치료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했지.
나도 갈 때까지 다 갔구나.
두달 전 내가 더 이상 치료 안할거라는 말에
집에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대여섯시간 내내 우셨다고 한다.
그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한 인생, 그런데도 이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고 했다.
집에 가서 어떻게 지내셨어요?
불가마 다니면서 찜질했지.
불찜을 하니까 위통도 좋아지고
신기가헤 배아픈 것도 좋아지더라고.
사람들이 좋다고 소개해주는 거 다 먹었어.
누에가루, 소나무가루, 상황버섯 그런 거 타먹고 다려먹고 그랬지.
그래서 좋아졌나봐.
자식들도 매일 전화해. 나한테 뭔 일 생길까봐.
효자됬어.
항암치료 못한다고 하니까 인생 끝난 줄 알았는데
안 아프고 좋더라고.
근데
일주일전부터 아랫배가 다시 아프기 시작하네.
어떻게 하지?
CT 찍어봐도 되요?
...
그래. 한번 찍어보지.
...
...
그래요. 오늘 CT찍고 다시 봐요.
내일 선거날인데 집에 못 가겠네.
선거 하실거에요?
그럼, 내 인생 마지막 선거일지도 모르는데 투표해야지.
그래요.
그럼 한달 뒤에 만나요. 일단 오늘 CT 찍으시면 제가 확인해볼게요.
할머니를 보냈다.
방금 CT 영상이 올라왔다.
확인해 봐야겠다.
난소암에 효과적이라고 입증된 약을 다 하셨다.
그동안 할머니가 내 마음을 몰랐던 건 아니었던것 같다. 다 알면서도 본인의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을 나에게 당신 방식으로 표현하신 거다.
할머니를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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