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남겨진 자식들의 마음

슬기엄마 2012. 4. 18. 16:27

언제부터 의식 불명 상태였는지 모른다.

점심 식사 후 1시까지 의사소통이 정상적으로 되었는데

그 후로 가족들은 환자가 피곤해서 주무시는 줄 알았다고 한다.

너무 오래 주무시는 것 같아 밤 11시에 깨웠는데 일어나지 않자 자식들은 비로소 환자 의식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12시 응급실에 도착한 환자는 심정지 상태였다.

일단 심폐소생술을 한 후 심장 기능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혈압도 낮고 소변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모니터링 수치들이 안정적인 범위 내에 있지 않고 계속 요동친다. 응급실 들어오자 마자 인공삽관을 했기 때문에 인공호흡기 치료를 지속할 수 있는 중환자실로 환자를 옮겨야 하는데,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것조차 위험할 정도로 환자 상태가 불안하다.

자식 셋은 아무말 없이 숨죽여 울면서 나를 쳐다본다.

모니터링의 숫자, 복잡한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심정지 상태가 반복될 수 있고 혈압이 잘 오르지 않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나의 설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 상황의 구체적인 의미를 모른 채 두려운 마음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들 침묵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15년전 40대 중반에 유방암을 진단받은 엄마.

그들은 자신 성장기를 유방암으로 투병중인 엄마와 함께 보내야 했다.

겨우 상처를 잊고 지낼 무렵

10년이 지난 후 뼈전이로 재발을 진단받았다.

지방에 사는 엄마가 재수술과 방사선치료를 받느라 서울로 왔다갔다 했다.

서울에서 막 직장을 잡은 아들, 갖 결혼해서 신혼을 꾸린 딸, 이들은 완치되지 않고 자꾸 재발하는 유방암 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를 지켜보아야 했다. 바쁘지만 엄마가 병원 다닐 때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뼈로 전이된 지 5년이 지나면서

환자는 점점 더 골반뼈 통증이 심해졌다.

방사선치료도 하고 여러 가지 종류의 진통제로 통증을 조절해 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증상 조절을 위해 이러 저러한 약을 많이 쓰게 되었고 그 부작용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였다.

 

병은 아주 서서히 나빠지고 있었고

통증은 해결되지 않고

컨디션은 조금씩 악화되고 있었다.

환자는 점점 짜증이 늘어갔다.

나는 언제 낫는 거냐고

언제 제대로 걸을 수 있냐고

왜 이렇게 못 고치냐고

매번 외래에서 똑 같은 질문을 했다.

통증 때문에 환자가 힘들어하면 나는 입원해서 조절해볼까요 했지만

환자는 입원해봤자 별로 좋아지는 것도 없다고 거절했다.

약 종류를 바꿔 드리면 이렇게 바꿔 먹어 봤자 별로 좋아지는 것도 없다고 처방을 거절했다.

환자는 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설득하고 화도 내보고 협박도 해보았다.

우리는 네버엔딩 스토리처럼 비슷한 말을 반복하며 부부싸움처럼 몇번을 싸웠다.

그렇게 싸우다가 정이 들었다.

 

환자는 항암제보다 항호르몬제에 반응이 좋았다. 지난번 외래 때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몇 걸음 뗄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었다.

 

그러나 그런 엄마를 모시고 다니는 아들의 표정은 항상 지쳐있었다.

집에서 가족들이 보시기에 환자 상태가 어떤 것 같냐고 물으면, 자기는 집에 늦게 들어가서 잘 모른다고 대답을 회피하였다. 자기는 주로 병원만 모시고 왔다갔다 하고 있다고 했다.

두 딸은 엄마의 불평 불만에 심리적으로 지쳐있었다. 환자가 나에게 계속 싫은 소리를 하면 눈짓을 하며 그냥 무시하라고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들 가족의 살림은 그리 넉넉치 않았다. 엄마의 병원비, 교통비, 입원비, 치료와 검사 약값으로 들어가는 비용들이 한창 가족을 부양하는 젊은 자식들에게는 부담이었다. 큰 딸도 몇번을 내 앞에서 울었다.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엄마를 가리키며, 언제 돌아가실 것 같냐고 나에게 묻기도 했다. 긴 병에 효자없다는 말, 쉽게 남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환자도, 가족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환자의 통증을 조절하지 못하는 나도 고통스러웠다.

 

이 환자는 재발 후 시간이 오래되었고 통증이 심해서 고통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치료를 중단하거나 포기할 상황을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기 암환자로 연명치료 포기각서를 받을까봐 응급실로 뛰어갔다. 아직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치료해서 위기를 넘겨야 한다며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겼다. 중환자실로 옮기는 순간, 내 마음에는 이렇게 위기를 넘기고 또 오뚜기처럼 일어서서 나 빨리 치료해내라고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환자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런 날이 또 올지도 몰라. 그러면 그땐 무슨무슨 치료를 해봐야겠다 그런 이후의 시점까지를 염두에 두며 나는 환자의 소생을 기원하고 다짐하였다. 유방암은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러나

환자는 몇 시간 만에 중환자실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엄마가 이 지경이 되는 것을 모르고 죽음을 방치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자식들은 지쳐있었고 그 죄책감에 상심하고 있다.

이렇게 돌아가실 줄 모르고

엄마에게 함부로 하고 엄마를 원망하고 엄마를 위로해주지 못하고 엄마가 그렇게도 원하던 고향땅 한번을 밟게 해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허망하게 시간이 지나가버린 것에 대해 그들은 원통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자식들 잘못은 아닐진데

당분간 그들의 영혼은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엄마도 자식들 마음에 멍에를 지우고 싶은 건 아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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