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Research에 관하여

슬기엄마 2011. 2. 27. 22:05

Research에 관하여

 

나는 지금 이 순간, mode를 완전히 바꾼다. 방금 전까지 혈압이 떨어지는 환자의 central line을 잡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편집장의 독촉전화를 받고, 할 일이 쌓여있는 병동을 벗어나 숙소로 왔다. 심장내과 1년차로 일한 지 1주일이 채 안된 오늘, 모든 일에 미숙하고 펑크 투성이다. 3년차 선생님은 이제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출 길이 없나보다. 그 얼굴을 보기 민망하다. 그렇게 병동에서 눈치를 보며 일하다가 숙소로 도망쳐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사회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 나는 양적 방법론보다는 질적 방법론을 선호했다. 대량의 모집단을 근거로 표본 집단을 선정하여 설문지를 통한 자료의 수집, 그리고 그 자료들에 대한 통계적 분석을 한다는 것은 일개 대학원생으로서 웬만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는 이상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원하는 의료사회학적 스터디는 거의 진행되는 것이 없었다. 대량 자료를 수집하는 일을 혼자 할 수도 없었고 나 개인의 학문적 관심사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발로 뛰고 사람들과 인터뷰하며 자료를 모으는 질적 방법론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됐던 것이다. 소위 가난한 연구자의 방법론으로서의 질적 방법론은 1990년대 이후 사회과학계의 조명을 받게 된, 아직 정착되지 않은 연구방법론이지만, 제한된 주제에 한해 시사하는 바가 풍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나는 매 학기 한 과목 이상에서 연구의 대상이 되는 소수 집단을 선정하고 그들을 인터뷰하며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곤 했었다
.

이에 비해 병원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연구들은 환자들의 sampling, 각종 검사들을 바탕으로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는 양적 방법론이 대세를 이룬다. 선행연구물을 참고하여 연구계획을 잘 세우면 환자들을 대상으로 좋은 데이터를 모을 수 있고 유수의 저널에 apply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자의 의욕을 자극하는 자료의 보고라 생각했었다
.

그런데 막상 1년차가 되어 교수 및 fellow 선생님들이 수행하는 연구에 enroll되는 환자군을 관리하고 검사를 진행하는 일을 담당하는 위치에 서고 보니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좋은 데이터를 모으고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는 나로서는 erratic data가 나오지 않게 하려면 자료 수집과정에 세심한 신경을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1년차로서 그 일을 한다는 것은 부담이 크다. 풍족하지 않은 연구비로 논문을 쓰려면 결국 무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원 전공의가 동원되게 마련이다.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하자. 그렇지만 사실 그 의미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따라서 나의 지적 감수성을 자극하지 않는 스터디의 자료들을 챙기는 일에는 전혀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화가 난다. 아니,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지? 나는 공부하고 환자보고 일하는 그야말로 단순한 1년차가 되어야 하는데, 그 단순한 삶의 질서를 깨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도 힘든데, inclusion criteria는 어떻고 exclusion criteria는 어떻고 control group은 어떻게 관리하고 뭐 이런 조건들을 논한다는 게 웬말인가! 아직 EKG도 제대로 reading하지 못하는 주제에 연구는 무슨 연구
!

우리 현실에서 연구에 매진하는 선생님들을 보면 존경스럽기 그지없지만, 좋은 연구성과물이란 개인의 무한한 헌신으로만 창출되지 않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면서 연구활동을 주된 job으로 하는 학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나는 꽤 근간에 이르기까지 대학에 남아 끊임없이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요즘은 그 마음이 참으로 흔들림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