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배고픈 1년차가 사는 법

슬기엄마 2011. 2. 27. 22:07

배고픈 1년차가 사는 법

 

나는 끼니를 놓치지 않고 챙겨 먹는 편이다. 꼭 밥이 아니라도 배를 채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원래 성격도 너그럽지 못한데 hypoglycemic해지면 의욕도 없고 우울해지고 쉽게 짜증이 나는 편이기 때문에, 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배를 채워 마음을 여유 있게 해줘야 한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철칙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일을 하다보면 끼니를 놓치기 일쑤라서, 뭔가 눈앞에 있으면 일단 먹어야 한다는 근성(!)이 생기고 있다.

일단 각종 conference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30분 이내로 금방 끝나거나 과 내부적인 집담회에는 먹을거리가 제공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밥을 주는 conference는 꼭 챙긴다. 내가 속한 과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식사를 제공하는 conference가 있으면 마치 그 주제에 관심이 많은 척 하며 들어가 밥을 먹은 후 병동 콜을 받은 척 하며 나오면 된다
.

9시가 넘으면 직원 식당에서 그날 환자들에게 제공되고 남은 식사들을 모아 무료로 식사를 제공한다. 11시 경에는 그곳에 가서 때늦은 저녁을 먹는다. 그래서 매일 환자들의 식단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날 밤 나의 반찬이 될 것이므로. 어제는 저염저콜레스테롤식 반찬만 나와서 별로 맛이 없었다. 고단백 상식이 남는 날은 꽤 맛있는 불고기도 나오는데
….

가끔 의무기록실에서 전화가 온다. 미비차트를 언제까지 정리해줘야 한다는 협박성 전화다. 짜증 대신 얼쑤, 반가운 마음이 든다. 오전에 의무기록실에 가면 맛있는 빵과 원두커피,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미비차트 정리는 의국 차원에서도 챙기는 사항이므로, 적당한 시간에 의무기록실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은 병동을 비우는 사유로 용납될 수 있다
.

공휴일이면 의국에서 도시락을 줄 때가 있다. 그 시간은 어김없이 선두에 서서 도시락을 타러 간다. 늦게 가면 그것도 없어지기 때문에
.

예전에는 윗년차나 교수님과의 회식이 있다고 하면 사실 귀찮은 마음이 들었었는데, 이제는 병원 밖으로 나가 바깥바람을 쐴 수 있다는 생각에 더해한끼 식사는 잘 하겠구나하는 원초적인 본능이 발동되어 기쁜 마음이 앞선다
.

병동에서 힘없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 마음씨 고운 간호사는 나를 슬쩍 불러내서 먹을거리를 건네준다. 선생님, 이거라도 드세요. 어찌나 고마운지. 표정관리를 잘 하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구나
.

의사실에 라면이 구비되어 있을 때도 있는데, 그땐 어김없이 포스트잇을 붙여 내 이름을 쓰고 prep해 둔다. 언젠가 나에게 유익한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으므로. ! 유치하여라. 여기까지 쓰고 보니 참으로 내가 불쌍하구나
!

머슴을 부릴 때도 밥은 잘 먹여야 한다는 것은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이다. 그런데 때때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일할 때면 서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에 윗년차에게 혼이라도 나면 서러움은 배가된다
.

그래서 오늘은 시도 때도 없이 chest discomfort가 있다는 심장내과 환자들의 EKG를 찍으며 병동을 뛰어다니는 우리 인턴 선생님들에게 피자를 쐈다. 물론 내가 제일 많이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후에 병동에서 일하는 그들의 얼굴 표정이 밝아 보여 흐뭇하다. 밥을 막 먹기 시작할라치면 EKG를 찍으라는 call을 받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심장내과 인턴 시절이 엊그제인데, 지금은 내가 미리 order를 내지 못해 일을 체계적으로 시키지 못하고 인턴들의 발품을 팔게 하는 1년차가 되었다. 미안함과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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