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새 병원에서 일한다는 것은

슬기엄마 2011. 2. 27. 22:08

새 병원에서 일한다는 것은

 

여러 일간지와 방송에도 소개됐지만, 세브란스병원이 새병원을 짓고 이사를 했다. 무릇 단칸방 이사 한번 하는 데도 가족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법이다. 며칠 동안의 어수선함과 고생을 감수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물며 중환자실이 이동하고 1,000명 이상의 환자가 자리를 다시 잡고 기존의 일부 병동을 폐쇄하는 등의 하드웨어의 변화와 함께 간호인력의 충원, 외래 및 입원환자 진료 체계의 변화 등 소프트웨어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짐이랴. 밖에서 보듯 근사한 새 건물로 가서 폼나게 일하는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아직 정식 open을 못하고 있는 EMR system 때문에 모르긴 몰라도 병원의 높으신 분들은 여간 마음이 쓰이는 것이 아닌 듯하다. 수 차례 리허설을 하지만 자꾸 에러가 발생하니 아직은 예전의 OCS를 쓰면서 EMR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문제는 EMR이 자리를 잡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전공의들은 정작 일에 쫓겨 새로운 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의료진과 실무진의 communication도 충분치 못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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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내가 일하는 내과의 경우 새병원 뿐만 아니라 구병원의 여러 건물에 입원 환자들이 배치되다 보니 예전처럼 선생님 한 명에 레지던트가 몇 명 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병동제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동선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병동제는 주치의가 병동에 상주하며 일정수의 환자에 대한 management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에 가장 큰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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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환자들의 입원은 완전히 병동제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대략은 과에 따라 병동이 정해져 있지만, 입원을 기다리던 환자들은 아무 병동이든 자리만 나면 덜컥 입원을 해 버린다. 입원 원무과에서 환자 입원을 결정하고 병동을 배치하는 행정시스템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겠지만, 내과 환자가 병원 곳곳에 입원을 해버리니 담당 전공의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내과 전공의들은 연차를 막론하고 새병원 이사 이후 과중한 업무에 지쳐 모두들 신경이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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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뀐 하드웨어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고 병동제라는 소프트웨어의 변화에 기존의 개념과 관습을 조율하여 효율적인 진료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에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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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나는 새병원에 별로 정이 안 간다. 의사 숙소도 깨끗해지고 병원도 말끔하게 단장하였는데 말이다. 아마 변화를 파악하고 새로운 뭔가를 배워 적응해야 하는 것에 나도 모르게 저항감이 드는 것 같다. 그래서 폐허처럼 변해버린 구병동 의사실을 여전히 애용하고 있다. 지저분하고 구질구질했던 옛 병동의 분위기가 더 마음이 편하다. 변화가 주는 혼란을 받아들일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나보다. 젊은 나도 이런데, senior staff 선생님들은 마음이 얼마나 심란할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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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란 반드시 혼란을 초래하기 마련이고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혼란의 와중에서 슬기롭게 대안을 마련하고 내부 구성원들이 단결하여 노력하는 것이 이치일진데, 전공의의 삶은 차분하게 그런 미래를 구상하고 현재를 견딜만한 여력이 안 된다고 변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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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병원의 이사는 단지 물질적으로 뭔가를 이동시키고 세팅을 바꾸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병원 경영의 철학이 반영되는 과정이며 더불어 의료적인 것이 비의료적인 문제에 부딪혀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매우 사회적인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불어 모든 변화가 그러하듯 리더십이 극대화되어야 하고 조직 구성원의 마인드가 새롭게 개편되어야 하는 조직 문화의 지각변동이 동반되는 과정인 것 같다. 부디 새로운 병원 문화의 창출이 이곳에서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