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걸어서 퇴원하는 그녀

슬기엄마 2012. 4. 28. 16:59

 

 

 

무슨 사연이 있었을 거에요.

그녀는 1년전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는데 치료를 받지 않고 지냈어요.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있었대요.

아직 나에게는 그 사연을 자세히 말하지 않네요.

부모님도 모르고 계셨나봐요.

 

그녀는 누워서 잘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져서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 왔어요.

그녀는 나랑 동갑.

아주 얌전하고 말수도 별로 없는 스타일이에요.

얼마나 아프냐고 물어도 참을만 하다고만 해요.

내가 봤을 땐 너무 아파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거 같은대요. 통증 때문에 자세가 굳어버린거 아닌가 싶어요.

조직검사를 하고 사진을 다시 찍었어요. 척추에 전이가 되고 골절까지 겹쳐서 많이 아팠던거 같아요.

 

이제 제가 항암치료를 하자고 하면, 하실 건가요?

 

항암치료 많이 힘든가요?

저 지금도 사실 힘들어서 자신이 없어요.

내가 이겨내지도 못할 치료를 하면서 생명에 너무 연연해 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없었지만

항암제는 한가지 약제로만 하기로 했어요.

환자에 따라 경과를 봐야 알겠지만 대개의 환자들이 아주 많이 힘들어하는 약은 아니라고 설명했어요.

일단 항암치료를 먼저 하고 상황봐서 방사선치료를 더하는게 좋겠다고도 했어요.

무슨 일인지 그녀가 순순히 그렇게 하겠다고 하네요.

 

그녀는 항암제를 맞고도 3-4일은 누워서 자지 못하고 계속 의자에 앉아서 잤어요.

앉아서 자니까 다리도 많이 부었어요.

진통제를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했지만 사진을 보면 많이 아플거 같아서 내가 그냥 먹으라고 했어요.

 

그렇게 꼼짝도 못하고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했던 그녀가

5일째 누워서 잘 수 있었고

7일째 되는 아침에 회진을 갔더니 자기 힘으로 걸어서 화장실에 다녀오고 있네요.

 

걸을 수 있어요?

 

그러게요. 걸어지네요.

 

그녀는 다음주에 걸어서 퇴원할거에요. 방사선치료는 통원치료로 왔다갔다 하면서 받을 수 있을 것 같대요.

겉으로 보기에도 몸놀림이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그녀가 병동을 걸어다니며 산책하는 걸 보니

항암제라는게 참 놀랍고 고맙네요.

 

제가 실력이 좋아 항암제를 잘 선택한게 아니구요

전이성 유방암에서 첫번째로 쓸 것을 권고한 약제를 쓴 것 뿐이에요.

그 약이 이 환자에게는 아주 잘 맞는 약이었나봐요.

같은 약을 써도 별로 좋아지지 않는 환자도 있거든요.

아직까지 항암치료 약제의 선택은 어떤 사람에게 어떤 약을 쓰면 효과가 좋을지 정확한 예측인자가 없는 수준이에요. 물론 이러한 예측인자를 찾아 현실에 도입하기 위해 무수한 연구가 시도되고 있고 일부 효과적인 마커를 찾은 경우도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그래서 우리는 임상연구를 하거나 표준치료 가이드라인대로 치료하죠. 저는 가이드라인대로 했는데 이 환자에서 효과가 좋았던 거에요.

 

그런데 환자랑 환자 어머니가 저에게 매우 고마워 하네요.

항암제한테 고마워 할 일 아닌가 싶어요.

 

정신과 동기 말로는

환자 입장에서

항암치료를 받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라

자신을 담당하는 주치의를 믿고 시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치료과정에서 환자가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갖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네요.

좀 어려운 일이 생겨도 주치의를 믿으면 그만큼 수월하게 견딜 수 있다고 본대요.

 

그러려면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환자와 믿음 관계를 형성하는게 중요한거 같아요.

생각보다 의사와 환자, 서로간에 그런 믿음을 갖는다는게 쉽지는 않더라구요.

제 환자 중에서도 여러 그룹이 있어서 좋은 관계, 썰렁한 관계, 그렇게 다양한 관계가 형성되는거 같아요. 그래서 인연일까요?

 

그녀와는 좋은 인연으로 맺어진 것 같아 기뻐요. 사람 사이의 관계나 믿음이라는게 때론 강할 수도 있고 때론 약해질 수도 있는, 그렇게 변화 무쌍하게 변하는 것이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요. 일단 치료 효과가 좋으니 첫번째 단추를 잘 꿰었네요.

 

조기 유방암 환자는 항암 치료를 마치면 나를 떠나 자신 삶의 영역으로 돌아가지만

전이성 유방암 환자와의 인연은 나랑 관계가 틀어져서 다른 병원으로 가시거나 특별한 사연이 있기 전에는 어쩌면 상당히 오랜 기간 저와 함께 할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3주에 한번씩, 4주에 한번씩 만나는 관계이니 왠만한 친구보다 훨씬 자주 만나는 셈이에요.

 

 

 

바깥 세상은 봄 없이 여름으로 넘어가는 듯.

어느 순식 갑자기 나무색깔이 바뀌었어요.

마르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연두색 잎파리들이 솟아나기 시작하네요. 생명력이 느껴져요.

다음주에 퇴원하는 그녀에게도 이런 푸릇푸릇한 생명력이 전달되기를 기도할래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