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먼저 보내지 않게

슬기엄마 2012. 5. 4. 22:34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나보다 오래 살게 해주면 되지?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 하시는 걸 들으면

옆에서 마음이 조마조마 했습니다.

근거가 없는 말씀 아니신가?

지키지도 못할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하시고

나중에 환자와 가족들이 상처받으면 어쩔려고 저러실까?

 

선생님께서 술을 많이 드셨는데,

환자보다 당신이 먼저 가서

환자와 약속을 지킬려고 그러시는건가

농담반 진담반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환자와 가족은 주치의가 신념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걸 듣고 싶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그런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1%의 확률이 있어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남편의 말씀에

가슴에 못을 박는 말씀을 드립니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률이 높지 않습니다.

 

저는 무슨 말을 이렇게 빙빙 돌려서 하는 겁니까?

기적을 바라는 가족의 마음

평균을 보고 치료하는 의사의 마음

 

당신보다 아내를 먼저 보낼 수는 없다고

부디 당신이 아내보다 먼저 눈감게 해달라고

목이 막혀 말씀도 제대로 못 하십니다.

이렇게 된 것이 다 당신 탓인 것 같다고

차라리 당신이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저도 전화를 끊고 한동안 말문이 막힌 상태로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짧은 기도를 합니다.

하느님,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확률이 높지 않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는 의사가 되게 해주세요.

환자 마음에 못 박지 않고

말실수 하지 않고

환자의 생명력을 믿고 치료하는 의사가 되게 해주세요.

제가 지금 선택한 항암제가 꼭 꼭 꼭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지금은 많이 부족하지만

공부 열심히 해서

시간이 지나면 지금보다 더 스마트한 의사가 되게 해주세요.

 

뭐든 도움이 된다면

돈이 얼마나 들던지

젊은 아내를 위해 뭐가 되든 다 하겠다는 나보다 젊은 남편의 절규에

힘없이 경고만 하는 무기력한 의사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