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다지 금슬좋은 부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할머니가 무슨 말씀만 하실려고 하면 할아버지가 말문을 막는다.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나선다고 자꾸 참견하며 훈수를 두신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한 말씀만 하시면 이내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선다. 진료실을 나설 때 할머니는 작은 목소리로 ‘선생님만 믿어요. 잘 치료해주세요.’ 그렇게 한마디만 하신다. 진료시간이 지연되어 많이 기다리는 날이며 ‘아이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선생님이 젤 바뻐’ 할아버지는 그렇게 침 한방을 놓고 가신다. 그냥 평범한 노부부시다.
부부가 늘 함께 병원에 다니지만
정작 나에게 진료를 받는 분은 할아버지다.
일흔이 넘으신 할아버지는 폐로 전이된 유방암 환자다.
그는 여자 환자들이 득세하는 대기실에서 늘 마음이 편치 않다. 누가 무슨 병으로 여기를 다니냐고 물어볼까봐 조마조마해 하신다. 자기 입으로 유방암이라고 말하는게 영 남사스럽다고 하신다.
젤로다 드시면서 수족증후군이 심해서 걸음을 걸을 때 지팡이를 짚고 걸으실 정도다. 그래도 치료 효과가 그만그만 유지되어서 약을 조금 감량해서 버티고 있었다. 젤로다는 그에게 세번째 항암약제이다. 유방암 투병기간도 4년이 넘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할 테니 잘 치료해달라’고 당부하시면서도 내가 권유하는 검사는 잘 안하시고 자꾸 미루신다.
나도 너무 철저하게 검사하지 않고 젤로다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약으로 바꾸면 병원 방문 횟수도 잦아지고, 연세가 많으시니 뜻하지 않은 약제 독성으로 고생하실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폐 전이 병변이 꾸준히 크기가 증가하고 있다. 가끔 옆구리 결리는 증상도 생기기 시작한다.
할아버지, 아드님 좀 한번 병원에 오시라고 하세요.
필요없어. 아들 바빠. 어차피 내가 받는 치료고 그동안도 내가 결정해왔어. 그냥 나한테 말해.
병이 조금씩 나빠지는 것 같아서 약을 바꿔야겠어요. 약을 바꿔서 그냥 치료 해도 되겠지만, 그동안 젤로다 드신지 2년이 넘게 안정적이었다가 이제 약을 바꾸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거잖아요. 그런 경과에 대해서 아드님께 한번 설명은 해야겠어요. 제가 한번도 뵌 적이 없잖아요. 한번 오시라고 하세요.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면서 도무지 내 말을 들을 기세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억지로 모시고 나간다. ‘제가 얘기할께요.’
그렇게 겨우 아들을 한번 만났다. 할아버지 치료에 대한 지금까지의 경과를 다 설명하고, 약을 바꾸어 치료를 해보겠지만 연세도 많으시고 지금 건강상태를 고려하면 자녀분들이 좀더 아버님께 신경쓰고 잘 해드렸으면 한다고. 그리고 생각보다 그 시간이 오래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협박성 발언을 한번 한 뒤,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맞는 주사로 약제를 변경하였다. 병원에 올때마다 백혈구 수치를 확인해야 하니 피검사도 해야 하고,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시간도 추가되고, 여러모로 젤로다보다 불편하다고 불평하신다. 늘 선생님만 믿는다고, 선생님이 치료 잘 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나에게 영 불만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할아버지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예전보다 좀 더 큰 목소리로 아는 척을 해도 이제 별로 제지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차라리 제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어요. 옆에서 지켜보는 게 더 힘들어요. 그냥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함께 죽었으면 좋겠어요.
어이, 그런 말 말어. 아무리 금슬좋은 부부도 같은 날 죽는 법은 없어. 하느님이 부르는 순서로 가는거야.
아직도 젤로다의 수족 증후군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신 할아버지, 한쪽은 지팡이에, 한쪽은 할머니에게 몸을 의지하고 진료실을 나서신다. 약간은 초라하고, 약간은 쓸쓸한 노부부의 뒷모습에서 긴 인생, 긴 투병의 길을 함께 하는 부부의 정이 느껴진다. 금슬로는 표현할 수 없는 더 깊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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