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탁월한 효과가 입증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이런 약을 쓸려면 과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학회장에서 만난 다른 병원 선생님의 안타까운 코멘트였다.
세계적인 규모의 학회가 열리는 곳에서는
환자를 보는 의사라면 누구라도 그 효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데이터가 발표되는 순간,
모두가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보내는 일이 가끔 있다.
이런 일이 자주, 매년 있는 것은 아니다.
(드물게는 그런 연구 성과가 몇년 후 반복적인 연구에서 결과가 번복되기도 하지만)
약제의 기전을 고려했을 때, 연구 과정이 과학적으로 타당했을 때, 기존 치료방법에 비해 탁월한 효과가 인정될 때 연구자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그 박수는 연구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효과를 치료적 이득을 보게 될 우리 환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 벅찬 마음으로 우리는 박수를 친다.
이번 학회에서도 그런 데이터가 하나 발표되었다.
HER2 양성인 전이성 유방암을 진단받은 환자에서 허셉틴과 탁솔을 쓰는 것이 표준적인 치료방법이라면, 여기에 퍼투주맙을 추가로 한 병용요법이 기존 약제에 비해 질병 진행기간을 6개월 이상 연장시킨다는 연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질병 진행기간을 6개월 이상 연장시킨다는 의미는 전체 생존기간은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을 연장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최종 생존기간의 연장은 좀더 추적관찰을 해야 확실한 결과를 보고할 수 있을 것이다.) 약을 하나 더 추가하였지만 관련된 독성도 거의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진행된 이 연구에는 우리 병원을 포함하여 한국의 여러 병원이 참여했고, 한국의 환자 등록율이 매우 높아, 국제적 임상연구 기관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보통 수백, 수천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전이성 암의 임상연구에서 질병의 진행기간을 2개월 이상 늘리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6개월 이상 연장은 치료의 획을 긋는, 일반적인 의사의 처방패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우수한 연구 결과이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현재 퍼투주맙을 수술 후 환자에게 투여하는 임상연구도 이제 막 시작되었다.
대규모 임상연구에서 입증된 약을 우리 현실에 적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금 표준 약제로 쓰고 있는 허셉틴의 적용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약제를 약제를 보험으로 인정하기까지, 혹은 보험이 아니라 비급여라도 처방을 허용되기까지 수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수년의 시간 동안 우리나라 환자에게는 약을 처방할 수 없다. 보험으로 그러한 기준을 승인하기 전에 이런 약제를 처방하는 것은 불법이며, 고소 대상이 된다.
그래서 매일 환자를 진료하는 내 머리 구조는 약제의 우수성과 효능이 아니라, 보험 기준에 맞추어 구조화된다.
물론 보험이라는 것은 전체 의료비용 증가가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 국가의 경제 규모를 고려하여 기준이 제정될 수 밖에 없다. 비용-효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럴싸한 약이 하나 나왔다고 당장 쓰게 해달라는 식으로 떼를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충분한 의미가 있고, 생존율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약이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보험 기준을 재조정하고 현실적으로 처방이 가능한 구조의 유연성을 보여야 한다. 소소한 감기약 비용을 낮추어 국민의 환심을 사는 것 보다는, 중요하고 의미있는 약들이 보험 구조 내에서 커버되고 보다 많은 환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정책적 관점을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아직도 많이 경직되어 있다.
비용의 차원에서 국민이 좀 더 부담해야 할 몫이 많아질 수도 있다.
어떤 약이 얼만큼의 비용효과적일지에 대해 좀 더 활발한 논의와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용 증가를 원치 않는 국민,
유연하고 효율적인 논의구조가 부족한 보건복지부와 심평원,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의견을 관철하려는 의사들의 노력 미흡 등이 한데 어울려
우리 변화의 흐름은 아주 더디다.
내 논문 하나 쓰는 것보다 더한 노력으로
이러한 학문적 연구 성과가 갖는 의미를 실재 진료과정에 적용하기 위해 보고서를 쓰고 몇 차례 주장해 봤지만 논의가 형성되지도 못하고 좌절되어 버리는 경험을 하고 나면 의욕을 잃게 된다. 그래서 보험기준 내에서, 삭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약을 선택하게 된다.
과잉진료를 규제하는 것과 효과적인 치료방법을 도입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요원한 것 처럼 보인다.
삶은
의미의 진정성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치열한 정치를 통해 결과를 창출하는 것이므로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가 이런 나의 뜻을 대신해 줄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자꾸 좌절의 경험을 맞보게 되면
도전하여 새로운 논의의 장을 형성하려는 의지가 침식된다.
그래서 소심한 진료, 경직된 진료를 하기가 쉽다.
어떤 병에서
어떤 약을 쓸 것인가
교과서적인 진료란 무엇인가
그 기준이
학문에서 나오지 않고 현실의 경제, 경직된 제도에서 나오게 된다면
우리 진료실의 현실은 아직 어둡다.
열심히 치료하면 뭐하나, 삭감당할텐데
이런 식으로 진료하면 뭐하나, 수지타산도 안맞을텐데
그런 반복된 좌절의 경험이 소심한 진료, 경직된 진료패턴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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