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 2일
사회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의대로 편입하여 첫 수업을 들었다.
생화학.
예과2년을 마치고 본과로 진입한 동기들은
잔뜩 긴장하여 한학기 세포학 수업을 세시간만에 끝냈다며 수업이 너무 빡세다고 툴툴거렸지만,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도대체 뭔 소리여?
산발적인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지식들이 마구 쏟아졌지만,
정작 나는 그들의 실체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옆에 앉은 동기에게 물어본다.
이게 다 뭣이여?
세포안에 있는 것들이죠.
세포는 핵이랑 인으로 구성된거 아니여? 뭐가 이렇게 많아?
고등학교 때 생물 안 배웠냐며 나를 비웃는듯한, 어이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회학을 공부할 때는
일단 전체 틀거리를 파악하고 그러한 관점을 유지한 채 지금 내가 주목하고 있는 사실들의 의미를 찾도록 훈련받는다. 세세한 것들에 집중하기 전에 나의 사고를 positioning 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의미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의미는 한 순간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역사적인 사건들과 함께 녹아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적 의미를 함께 고려하여 지금 눈앞에 놓인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빠른 사고보다는 여러 번 내면적인 질문과 성찰을 통해 의미를 분석하도록 훈련받는다.
의대 수업은 빠른 사고, 그걸 따라갈 수 없으면 빠른 암기하도 하라고 요구한다. 나는 생화학 수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교과서를 읽어도 수업 진도는 너무 빨랐다. 나는 F를 면하기 위해 기를 쓰고 공부해야 했다. 한 과목만 받아도 의대는 낙제니까 일단 F를 안 받는게 중요하였다. 나는 그렇게 생화학을 겨우 통과하였고 더 이상 이 분야의 지식을 대면하지 않기를 바랬다.
내가 의대입학을 결심했을 때
내가 내과를 결정했을 때
내가 종양학을 선택했을 때
나는 질병의 생물학적 사실보다는
암이라는 병이 발생함으로써 환자와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 가족관계의 변화, 환자의 정체성, 암환자의 삶의 질과 생존자로 살아가기 등과 같은 주제에 관심이 더 많았다. 정통 의학의 내부적 관심보다는 다소는 사회적 심리적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는 비생물학적 주제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러나 의사가 되기로 한 이상 나는 최소한 평균은 해야 했고 내 관심은 묻어둔 채 평균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의사로서 평균이 되는 것도 쉽지 않아 오늘날까지도 이렇게 버벅거리고 있다.
난 그래서 DNA 분석같은 유전자 관련 분야를 외면하고 싶었다. 그 분야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난 그냥 환자를 잘 보는 평균적인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내 꿈을 이루어야지 생각했다.
유방암을 진단받고 수술 전 항암치료를 하는 환자들.
대부분은 항암제 반응이 좋아 유방 절제술의 범위도 줄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전이암을 미리 제거하는데 유용하다. 유방을 절제하지 않을 수도 있고 수술 범위가 줄어들기 때문에 치료 이후 삶의 질에도 도움이 된다. 여러 임상연구에서 수술 전 항암치료가 수술 후 항암치료와 효과가 같거나 조금 더 우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항암제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심지어 금방 다른 장기로 전이되어 버린다. 항암치료만 잘 받으면 수술도 하고 완치될 거라고 기대했던 환자들이 몇개월 사이에 확 나빠지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환자와 가족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지금 병동에는 그런 환자가 세명 입원해 있다.
항암치료 중에 폐렴이 온 것 같아 입원했는데, 보통 폐렴과 달라 조직검사를 해 봤더니 폐전이였다. 우연히 한 검사에서 뇌전이가 발견되었고 갑자기 소변이 나오지 않아 투석을 해야 할 정도였다.
항암치료를 하다가 허리가 아파서 그러려니 했는데 뼈 전이를 비롯해서 다발성 장기로 전이가 되어버렸다.
이들은 수술의 기회도 놓치고 이제 완치를 말하기 어려워졌다. 수술을 했어도 이런 환자들은 금방 재발하게 된다. 완치는 커녕 이후 항암치료에도 잘 반응하지 않는다.
어제 한 환자는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으로 인공삽관을 하고 중환자실로 갔다. 갑작스러운 폐렴의 악화인지 폐전이의 빠른 진행인지 정확히 감별할 수 없기 때문에 인공삽관을 하고 최대한 적극적인 치료를 해야 했다. 폐전이의 빠른 진행이라면 회생 가능성은 없다.
나는
내 눈앞에서 환자가 나빠지는게 눈에 보이는데
어쩔 도리가 없는 상태로 나빠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힘들다. 의사로서 자괴감이 든다.
이번 학회에서
이렇게 난치성 유방암 환자 26명을 대상으로 유전자검사(whole genome sequencing)를 하여 환자마다 각기 다르게 발견된 유전자 변이를 찾아, 그 유전자를 타겟으로 하는 표적치료제를 써서 좋은 치료결과를 보인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들은 1차 표준치료에 실패하였고 임상연구로 이와 같은 검사와 치료에 도전하였다. 표준치료가 아닌 방법에 도전하였다는 면에서 다소 위험이 있었지만, 그리고 연구비도 엄청 많이 드는 검사와 치료가 진행되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whole genome seqeuncing은 한 번 하는데 천만원 이상의 비용이 든다. 그리고 유전자 이상이나 변이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이에 맞는 표적치료제가 개발되어 있지 않다면 치료제를 선택할 수도 없다. 여러모로 기회 비용이 많이 드는 임상연구라 나같은 사람이 시도하기는 어려움이 많은 연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대책없이 나빠지는 나의 환자들을 보면서
결국 유전자 연구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도대체 왜 이런 재난과 같은 일들이 생기는지,
왜 누구는 표준치료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나빠지는지,
난치성 환자의 사례들을 보면 연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지난 1년간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빠지다가 죽은 환자들의 명단을 정리하고 그들의 조직을 모아봐야겠다.
그것이 큰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로서
앞으로 닥치게 될 상황을 준비하는 최소한의 노력이 될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할 수는 없더라도 그 기반을 만들어놔야 할 것 같다.
환자에게 설명을 잘 하는 것
환자에게 용기를 주고 자신의 병에 패배하지 않도록 격려하는 것
환자가 나빠지면 환자 곁을 떠나지 않고 최선의 치료를 다하는 것
그것만으로
모든 환자가 다 좋아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연구하는 의사, 그런 사람도 필요하다.
나는 연구하는 의사가 되기에 부족함이 많다.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환자를 보면 볼수록
그런 나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아직 부족함이 많은 나는
중환자실에 가서 환자나 보고 와야겠다.
어제보다 엑스레이가 더 나빠졌다.
한숨이 나올 뿐이다.
나빠지는 코스를 함께 지켜 본 남편에게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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