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내 생애 봄날은

슬기엄마 2011. 8. 12. 00:19

올 초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환자들을 위해
설명서와 다이어리를 만들었다.
내가 봐도 럭셔리한 다이어리의 제일 앞장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당신께

난생 처음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당신,
혹은 재발이 되어서 다시 항암치료를 받게 된 당신.
지금 마음속에 자리잡은 두려움은
항암치료 자체보다는
치료 이후 내 삶은 과연 어떻게 될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항암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어려움, 혹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이 다이어리에 기록하고 저희 의료진과 상의해 주십시오.
이 다이어리는 항암 치료 중인 당신의 하루하루를
의료진과 함께 공유하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무기가 될 것입니다.
아무 문제없이, 무사히 항암치료가 진행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꿋꿋이 잘 이겨내실 겁니다.
그 모든 과정을 이 수첩에 담아 주십시오.
치료를 마치고 이 수첩을 덮을 떄,
암은 더 이상 당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이룬 작은 기적은
다른 환자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짧은 글을 쓰기 위해
몇날 몇일을 고민했었다.
맨정신으로 글이 써지지가 않아
술도 많이 마셨다.

다이어리에 치료, 검사 일정을 적어주고
환자는 자신이 경험하는 부작용을 적어온다.
또 일상 생활을 하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도 적어온다.
상태가 좋을 때는 기록이 별로 없다.
어지럽기 시작하면
설사를 시작하면
피부가 간지럽기 시작하면
기록이 다시 시작된다.
꼼꼼히 적어오시는 환자들이 꽤 많다.
난 환자들이 일상에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
그 눈물겨운 투쟁을 점검한다.

이번달에는
항암제 부작용 소책자에 이어
암환자의 영양관리, 정신건강, 통증 조절 등에 대한 소책자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8월에 원고를 마감하고
9월에는 교정봐서
추석이 지나면 발행할 예정이다.
난 또 이 글들을 쓰느라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내 생애 봄날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다.
봄날은 가지만
내 상처를 끌어안은 그대가 있어서 내 삶은 행복했다.

난 이 구절을 들으려고 울적할 때 반복듣기를 한다. 

글을 쓰는 것에
나의 정열과 기를 너무 많이 뺏기지 않아야 하는데...
난 그럼에도 나의 내부에서 뭔가 소리치는 그것들을 기록에 남기고 싶어서
일기처럼 글을 쓴다.
그러나 환자를 위한 책자를 만드는 것은
그런 일기와는 달라서 부담이 된다.
정신건강에 관한 책자의 원고는 정신과 선생님이 초고를 주셨지만
환자들이 읽기에 너무 딱딱하고 무서운 느낌이다.
그런 내용들을 읽기 편하고 도움이 되는 정보를 담아
추석이 지나면 환자들에게 작은 선물로 드리고 싶다.
상처를 보듬어 주는 진료.
그것이 의사인 내가 암치료를 하면서 꼭 기억하고 싶은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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