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성당을 다녔고
고3때도 한주 빠짐없이 매주 미사 반주를 하는 착한 성장기를 거쳤건만
대학 입학한 후부터는 성당도 안다니고 기도 전혀 안하고 냉담하며 살았다.
의사가 된 다음,
어쩔 수 없이 혹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의사라 하더라도 할 수 없는게 훨씬 더 많다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까.
사회생활, 조직생활 하면서 세상의 모순과 잘못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그냥 묵인하고 지지부진 사는게 나라는 게 부끄러우니까.
그러나 달라진게 있다면,
여전히 믿음은 창호지 수준이고
특별히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가끔 환자를 위해 화살기도를 한다는 것 정도.
주님, 저는 능력이 별로 안되니까, 하느님이 좀 봐주셔야 할 것 같아요. 부탁드립니다. 이정도.
주일미사도 잘 빠지고
고백성사 보기 싫어서 또 안가고
뭐 그런 날라리 종교생활을 한다.
요즘은 너무 바쁘게 하루하루가 지나가니까
일요일마다 성당을 가는데도 꼭 매일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매주 한번 듣는 복음말씀인데도 매일 듣는 것 같다. 내용이 쭉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3주간의 복음은 예수님의 기적시리즈이다.
예수님은 생각보다 '싸'한 분이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냥 인자롭고 무조건적으로 중생을 사랑하지는 않은 것 같다. (최근 3주의 복음을 보면 그렇다) 현실에 피곤해하고 자기에게 떨어진 짐과 운명을 버거워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수님은 중생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고, 복잡한 맥락 속에서 한마디씩 던지시면서 기적을 행하셨다. (난 사실 기적이 좋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카 역시 예수님!~ 기적 '좋아요'를 마구 눌러드리고 싶다)
이번주 아픈 딸을 위해 도움을 청하는 이방인 여인의 간청에
세번 싸한 반응을 보인 예수님.
그렇게 차가운 반응을 보인 핵심적인 이유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굴절된 렌즈'를 버리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의 틀로, 자신의 이념으로, 이방인을 배척하려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정된 틀을 다시 점검해보라는 말씀을 하시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 절대적인 믿음을 보인 이방인 여인은 결국 예수님의 마음에 들어 딸이 나았다.
난 이 복음을 들으며
'와 예수님이 말한 그 순간에 딸이 나았다고?
무슨 병이었을까?
무슨 병이 그렇게 순식간에 나을 수 있지?
성서에 나오는 이벤트는 어떤 상징이랑 연결되어 있으니, 아마 그 딸도 뭔 병이 있긴 있었을텐데... infeciton이었을까?
어쨋든 좋겠네. 나도 그렇게 환자를 깨끗이 낫게 하는 의사가 되면 좋겠다'
뭐 그런 잡생각을 하고 있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도 여러 겹의 렌즈가 놓여있다. 항상 투명하게 직선으로 빛이 통과하지 않는다.
뭐든지 하느님이 다 해줄 수는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야지. 그리고 그 다음은 기다리는 것. 의사노릇 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좋은 성적표를 받고 싶다. 100점은 아니어도 90점은 넘고 싶다. 렌즈가 굴절되지 않게 매일 깨끗한 수건으로 닦으며.
일요일 오전 병실에 가보니
환자들이 예배보고 기도드리려고 자리에 많이 안계셨다.
기도를 하러 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아지셨구나 하고 안보고 왔다.
배 부르고 힘들어서 걷지도 못했는데
휠체어 타고 예배보러 가신거면 많이 좋아시긴거네....
우리 환자도 깨끗이 나아 퇴원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