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태도도 중요하지만

슬기엄마 2011. 8. 17. 10:38

설명하는 의사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태도는 중요하다. 그런데 태도가 본질일까?

중환자실 들어간지 한달이 넘었는데
어제 나온 환자.
다른 과에서 진료하다가 협진을 통해 내가 진료를 이어받은 환자이다. 중환자실 있을 때 전과를 받았다. 치료 가능성이 너무너무 낮고, 의식도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환자의 뇌에 방사선치료가 시작되었다. 뇌의 아랫부분, 뇌신경이 나오는 부분에 종양이 있어서 의식과 호흡이 좋지 않았는데, 여러 우여곡절끝에 치료가 시작된 상태에서 나는 이 환자의 주치의가 되었다.
보호자들은 한달 이상된 병원 생활에 이미 지쳐있었고
환자는 병원에 올 때 걸어 들어왔는데 치료가 늦어져서 중환자실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환자를 보지 않았던 초반 한달 사이에 뭔가 얽히고 섥힌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 부분에 대해서 나는 노 코멘트로 일관했다.

그러나 난 내가 환자를 담당하게 되었고 방사선치료를 시작하기로 한 첫날,
인공삽관 가능성을 설명해야 했다.
병이 있는 부위가 호흡중추이기 때문에 인공삽관과 심폐소생술 등의 조치가 뒤따를 수 있는데, 과연 보호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 답변을 들어야 했다. 방사선치료를 시작했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치료하겠다고 결정한 것이고 - 나의 뜻과 무관하게 이미 결정된 사항이고 - 그럴려면 위기 상황을 미리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결정 하나 하나에 한시간 이상의 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신뢰는 잘 쌓이지 않았다.
이들이 나를 믿지 않는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았다.

그런 환자가 치료 중간에 인공삽관을 하고 다시 기관절개술을 하고 자발호흡을 하는데 성공하고 바이탈 싸인이 다 안정적인 상태에서 어제 일반병실로 나온 것이다. 환자는 가족의 목소리를 알아들었고, 아직 종양에 눌려 눈은 제대로 못 뜨지만, 상황을 이해하고 있음을 고개와 손동작으로 표시하였다.
나는 중환자실을 나온 것만으로도 감동이었다. 담당 간호사와 담당 레지던트에게 얼마나 고맙다고 인사했는지 모른다. 조만간 밥이라도 꼭 사줄 생각이다.

그런데 보호자는 불만이 너무 많다.
중환자실 면회를 가보면 라인에서 약이 새고 있고, 담당 의사 설명도 너무 비관적으로 불성실하게 하고, 모두들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동의하지만
최소한 중환자실에서는
태도보다도 환자를 살려서 안정적으로 일반병실로 내 보내준게 난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환자의 예후는 좋지 않다.
나의 일차목표가 일반병실로 나오는 것이었고
이차목표는 가족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눈을 제대로 뜨고 말도 할 수 있게 되어 죽기 전에 가족들과 얘기나누는 것이다. 이미 폐, 간, 뼈 등 전신적으로 병이 퍼진 상태이고 지금 항암치료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병은 계속 나빠지고 있을 것이다 (검사도 하지 않고 있다. 검사의 의미가 없으니까).
항암치료를 같이 할만한 컨디션이 안된다. 만약 치료를 같이 했다간, 지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빠질지 모른다. 앞으로 다양한 합병증이 생길 가능성이 아주 높다.

가족들에게
섭섭한게 많으시더라도 이해하시라고,
지금 이 정도 환자의 컨디션을 안정시켜 준 것이 다 중환자실 치료가 잘 되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들에게 너무 고맙다고,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 하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나의 말에도 믿음을 주지 않는다.
경험이 짧은 젊은 의사들이 인간관계에서 미숙하게 대처하는 측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중환자실에서 밤잠 안자고 갖은 노력으로, 환자들을 붙들고 고민하며, 최선을 다해 환자를 안정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그 과정, 시간들을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겠지...

실력도 좋아야 하고
태도도 좋아야 하고
커뮤니케이션도 잘 해야 하고
보험도 잘 알아서 처방해야 하고
의사하기 힘들다.
다른 직업도 다 마찬가지지만...
오늘은 떡치고 욕먹은 우리 레지던트에게 맥주 한잔 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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