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에 가면 문구류를 파는 가게가 있는데
가격이 보통 문방구보다 무지하게 비싸다.
가끔 만화책을 사기 위해 슬기와 교보문고를 가면 슬기는 만화책에, 나는 문방구에 넋을 잃고
구경을 한다. 서로 얼마만큼의 범위안에서 지를 것인지 눈치를 보면서.. 그리고 서로의 선택에 대해 실컷 비웃음을 보낸다. 그거 살려고 여기까지 온거야? 하면서
난 그렇게 얼마전 예쁜 수첩을 하나 샀다.
그리고 매일 외래 준비를 할 때 그 수첩에 기억할만한 환자들의 병원 아이디 넘버를 써놓는다.
아직 폴더 형태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나에게 뭔가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들의 사연을 적어놓는다.
장기 생존자, 가족 내 유방암 환자가 또 있는 사람, 뇌전이 치료가 잘 된 사람, 뼈전이만 있는 채로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오랫동안 생존하고 있는 사람, 허셉틴만으로 몇년을 버틴 사람, 전이된 삼중음성암인데 항암치료로 드라마틱하게 좋은 반응을 보인 사람, 어이없이 병이 빨리 나빠져서 상태가 악화되고 있는 사람...
그들은 나에게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난 아직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다음 환자를 어떻게 치료하는게 좋을지 분류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그냥 정리해보고 있다.
그렇게 환자들을 정리하고
다음날 외래에서 그들을 만난다.
또 꿋꿋하게 그들은 항암치료를 받으러 왔다.
요즘은 날씨가 않좋아서 그런지 - 전혀 과학적 근거 없음 -
백혈구 수치가 잘 오르지 않아 항암치료를 못받고 한주일 쉬어야 하는 환자들이 많다.
다들 입맛이 없어서 고기를 못 드시나...
내 수첩에 이름이 등재된 환자들.
동생이 유방암 진단을 받고 치료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언니가 또 유방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 자매들이 꽤 있다.
아직까지 유전성 유방암의 유병율은 우리나라에서 잘 밝혀져 있지 않은데...
언니는 담담하게 치료를 잘 받고 있는데
동생이 눈물바람이다.
자기가 겪었던 힘든 시간을 언니가 또 겪게 된다는 것이 속상한 모양이다.
화장도 예쁘게
환자인지 전혀 모르게 잘 꾸미고 온 환자.
남편이 함께 외래에 왔다.
환자는 예쁘고 하나도 안 아파 보이는데
남편분이 환자 같으시네요. 수액좀 맞고 가실래요?
농담삼아 말했지만
남편의 진지한 표정은 풀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제주도 설록차 세트를 선물로 주고 갔다. 무뚝뚝하게.
이번 여름에 제주도를 다녀오셨나 보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만
오늘처럼 알러지가 심한 날은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남편이 준 녹차세트를 풀어본다.
고급스럽고도 예쁜 차 세트.
콧물이 줄줄 흐르는 걸 막아보려고 차 한잔을 마셔보기로 했다.
9월부터는 월화수목금 매일 외래가 열린다.
나는 매일 외래 예습을 하고 그들을 분류하여 수첩에 이름을 기록하려고 한다.
씩씩한 환자들, 힘든데 잘 이겨내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 묵묵히 치료하는 그들의 노력에
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그 환자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한 경험으로 그 다음 환자들을
더 잘 치료하는 것
그것이겠지.
차 한잔씩 마실 때마다 그들이 일상에서 벌이고 있는 투쟁에 화답하여
나도 열심히 투쟁하며 매일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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