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가 할 수 있는게 없는게 제일 힘들어요

슬기엄마 2013. 6. 10. 20:40


오늘부터 출산휴가에 들어간 선생님을 대신하여

진료를 보게 되어 외래 환자수가 급증하였다.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아직 라뽀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데 

갑자기 그런 환자들을 무더기로 만나 상의를 하고 치료를 해야 한다는건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주말 내내 마음이 불안불안.

그들도 처음 만나는 내가 낯설고 불안하다. 

나도 주말동안 예습을 한다고 했지만 

내가 계속 진료해 오던 환자만큼 익숙치 않아 외래 시간이 지연되었다.

사실 지연시키지 않기 위해 무지하게 애를 썼는데 

세명 정도의 환자랑 면담이 길어지는 순간, 한시간이  넘게 훌쩍 지연되어 버렸다.

늘 그런 식이다. 

두세명과 예정에 없이 대화가 길어지면 외래는 늘 그렇게 지연되어 버린다. 


그렇게 길게 늘어진 외래의 마지막 환자.


굳세게, 

개인적인 어려움이 있어도 꿋꿋하게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도  

일정에 맞추어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아 오셨는데

최근 몇개월 치료가 지지부진하였다.

병이 조금 나빠진 탓도 있었지만

부수적인 합병증을 해결하느라 

항암치료 일정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병이 나빠졌다.

이제 난소암에 쓸 수 있는 효과적인 약제는 다 쓴 상태.

항암치료를 해도 줄어들지 않는 몇군데 병변에 대해 방사선 치료를 해 보기로 했다.

방사선 치료가 정답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선 효과가 좋은 항암제를 정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환자는 긴 외래를 기다려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외래진료를 신청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동안 치료 받으면서

건강보조식품이나 사람들이 권유하는 민간 요법 등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의사인 내가 하라는 대로

내가 먹지 말라는 거 안 먹고 

하지 말라는거 안 하고 

노력하라는거 노력하면서 열심히 치료받았다.


선생님

제가 지금 저를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요?

이제 좀 초조해 지기 시작하네요.

아이랑 떨어져 지낸지도 너무 오래되었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생각하기가 힘드네요.

내가 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게 뭔지 모르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게 있기는 한가요?

림프부종이 악화되니까 많이 걷지도 못하겠고

자꾸 부으니까 컨디션도 나빠지고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하지만 소화도 잘 안되고

제가 뭘 할 수 있는걸까요?


조용히 말하지만

절규에 다름아니다. 


뱃 속의 병이 심하지도 않은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

소변이 잘 나오지 않아 요관을 끼웠고

부종 때문에 퉁퉁해진 다리를 꽉 조이는 스타킹을 신었다.

좋아질 수도 있지만

나빠질 가능성이 더 많다.

이미 써볼만한 약은 다 써봤으니까.

그녀에게 좋아지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지난 외래 때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기에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충분히 다 말하지도 못했다. 


오늘은 유달리 병이 나빠진 환자가 많았다.

환자 나빠진 것이 내 탓은 아니라고 아무리 굳게 마음을 다잡지만

마지막에 이르니 나도 마음이 흔들린다.

어찌해야 하나...


맞아요

지금 환자가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네요.

제가 방사선 치료 일정이라도 좀 앞당겨 달라고 부탁드려 볼께요.

그래도 지금 특별히 아주 아픈 증상이 없으니 다행이에요.


이걸 위로라고 하는 걸까?


환자는 환자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 보려고 하지만

그것이 크게 도움이 안되거나 부질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나 조차 어찌 도울 방법이 없으니

환자들은 현대의학의 한계를 느끼고 다른 곳에서 대안을 찾으려고 할지 모른다.

그게 돈이 얼마나 들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그저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으니까

그렇게라도 자기가 좋아질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이 0.001%라도 해 보고 싶어한다.

이름을 바꿔 보기도 한다.

뭔가 운명의 흐름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까?


지금이 제일 좋은 순간일지도 몰라요.

6개월 후, 혹은 1년 후에 내가 죽는다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내가 꼭 해야 하는 말은 무엇일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런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 말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얘기를 외래의 타이트한 시간의 압력속에서 

시계를 쳐다 보며 3분, 5분을 새겨가며 진료하는 내가 

얼마나 여유롭게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가며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환자는 그런 조급한 내 마음을 다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설령 내 심정을 이해한다 해도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런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미적지근한 대화를 마치고

답답한 마음을 해결하지 못하고

외래문을 닫고 나온다.

그렇게 가슴에 피멍이 든 환자들의 병원 등록번호를 수첩에 적어

지금부터 고민을 다시 시작해 본다.


그를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하는게 좋을까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좋은 해답이 나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