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내 파트에서 일하던 전공의가 그때 나와 함께 준비했던 스터디 결과를 가지고 초록을 준비하여 올해 열리는 미국암학회(ASCO)에 제출하였는데 초록이 채택되었다!!!
ASCO는 전 세계의 암 관련 연구자, 임상의사들이 다 참여하는 학회라서 매년 3만 5천명 이상이 참여하는, 종양학 학회 중에 가장 큰 학회다. 그래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초록을 내기 때문에 채택이 되기도 어렵다. 내 아이디어로 출발해서 자료를 정리해 초록을 냈는데 채택이 되어서 정말 기뻤다. 아직 논문을 완성한 것도 아니고, 논문이 좋은 저널에 실린 것도 아니고, 초록도 단지 포스터 구연에 불과하지만, 나는 아주 기뻤다.
내과 전공의 모두에게 해외 학회 참여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에서 비행기값 정도는 지원을 해주지만, 기타 숙박비나 등록비, 식비 등을 고려하면 여러 모로 어려움이 많다. 무엇보다 좋은 학회에 초록이 채택될 만큼 연구하고 공부할 시간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전공의 한명과 논문을 위해 상의하려고 만나면, 그 사이에도 쉴새 없이 울려대는 병동 콜 때문에 대화를 제대로 나눌 수도 없다. 주말 밤이나 되야 겨우 시간이 날까?
겨우 짜투리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그동안 지친 몸과 마음, 잠자고 쉬느라 정신이 없다. 공부를 할려고 해도 이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차트를 뒤져 데이터를 입력해도 아직 자기 생각이 명확하지 않으니 차트를 몇번을 다시 봐야 하는지 모른다. 겨우 정리했다 싶은데, 뭔가 부족해서 또 정리하고, 또 분석하다 보면 변수가 부족해서 다시 차트를 찾아 다시 정리해야 하고... 통계를 돌려 데이터 정리하는 것도 생전 처음이다. 기존 선행 연구논문을 찾는 것도 익숙치 않고 영어로 한 문장 한 문장 쓰는 일도 어렵다.
그렇게 어려움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전공의들을 다그치고 독려하고 협박하여 논문을 쓰게 하는 게 선생의 일이다. 그러므로 논문 쓰는 과정에서 가이드를 잘 해주어야 전공의가 덜 고생하면서 논문을 쓸 수 있다. 떠서 먹여주는 것도 안될 일이지만 너무 헤매게 만들어서도 안되니까 선생의 역할이 중요하다. 너무 완벽하게 준비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다. 적당히 도와줘서 성취감을 느끼게 해 줘야 한다.
그렇게 준비한 자료가 좋은 학회에 초록으로 채택이 되었으니 비록 이 녀석이 종양학을 전공할 계획은 없지만 큰 물 구경을 한번 시켜주고 싶었다. 종양내과 전문의가 아니기 때문에 학회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지만 궁하면 통하는 법. 마침 빈 자리가 있었는데, 사정사정, 애걸복걸,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남들보다 늦게 특별 케이스(!)로 지원 대상자가 되었다는 연락을 어제 받게 되었다.
내가 학회를 가지 않으니 그가 혼자 포스터 발표도 하고 낯선 학회장을 헤매겠지만, 선생이 옆에 없으니 부담없고 더 자유로워서 좋겠지.
지금 내가 일하는 병원을 떠나, 환자 진료의 부담을 잠시 잊고, 새로운 학문의 장을 경험하고 공부하는 기회를 갖는 것은 또다른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환자를 보는 것과 연구를 하는 것이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 결국 표준 지침을 바꾸고 의학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다소 거창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또 공부가 좀 미흡하면 어떤가. 낯선 곳에 가서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오는 것만으로도 많은 에너지 충전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 그를 만나 그동안 묵혀둔 초록을 꺼내 논문으로 완성하기 위해 어떻게 글을 쓸 것인지 상의하였다. 응급실에 있는 그가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불러냈다. 막상 학회를 가게 된다고 하니 새로운 의욕이 샘솟는지 그의 눈빛이 살아난다.
사실 그가 논문을 안 쓰고 있었던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 나에게 논문을 엮을 만한 아이디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자료를 어떻게 분석하고 엮어서 설명을 해야 그럴싸한 논문이 될지, 자료를 보고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학회를 가게 된 것을 계기로 나도 정신을 차리고 이번 주말동안 마음을 가다듬어 자료를 다시 보고, 기존 논문들을 찾아보았다.
극적으로(!) 오늘 스토리를 만들었다.
내가 엮은 스토리를 가지고 그를 만나 우리 자료를 보면서 설명했다. 내가 찾은 자료도 다 주었다. 내 설명을 알아먹는 눈치다.
그가 어떤 작품으로 요리해 올지 궁금하다.
마음 속 묵은 짐을 한켜 벗은 것 같아 개운하고 기분이 좋다.
그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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