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려치고 싶을 때

슬기엄마 2013. 4. 29. 23:36


레지던트 때는 세상을 바라보는 폭이 좁은 것 같다.

내가 의사라는 사회적 지위를 겨우 획득하고 그 자리를 유지하는데 급급하다.

아는 것도 확실하지 않고

아는 것을 직접 환자를 대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당황스러움, 두려움 등이 교차한다.

모르면 째버리면 되는, 그런 무책임한 행동이 용서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내 1년차 때의 목표가 '내 실수로 환자를 죽게 하지는 말자' 였겠는가.


익숙해질만 하면 모르는 상황이 발생하고

다시 익숙해질만 하면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고

그런 수천번-진짜 수천번-의 학습과 경험을 통해

의사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

아무리 모르겠어도 그게 내 일이라면 계속 해야 하고

아무리 하고 싶지 않아도 단 한순간도 비겁하게 물러서지 못하고 계속 해야 한다.

모르니까 구박받는 것 쯤은 루틴이다.


자존심? 

그런 건 없다. 

무시당하고 모욕감을 느껴도 그건 내가 무식하기 때문에 그런 거니까 참아야 한다. 

판독을 푸쉬하러 갔다가 왕 무식한 레지던트 취급받고 왕 창피를 당했던 적이 있었다. 

내시경 처방 잘못 내서 내시경 방에 불려가 완전 혼나고 내시경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옷 갈아입고 수술방에 찾아가서 내가 잘못 처방한 내시경 오더때문에 선생님 환자에게 피해가 갔다는 점에 대해 수술 중인 외과 선생님을 찾아가 잘못을 말씀드리고 용서를 구해야 했던 적도 있다. 

그때는 그런 일이 속상하거나 자존심 상하지도 않았다.

그냥 시키면 하면 되고 혼내면 야단 맞으면 됬다.

혼나고 나오면서 나는 씩 웃었다.

그래도 해결됬으니 다행이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끝도 없이 밀려 온다. 


레지던트 때는 

자를 볼 때도

당장 눈앞의 환자, 오늘 밤 내 앞에 있는 중환의 바이탈을 지키는 것에는 익숙할지 몰라도

그 환자의 장기적 치료 계획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환자의 여타 형편을 고려했을 때 어떤 치료적 접근이 유용할지, 

의학적인 측면 이외에도 치료를 결정하는데 고려해야 하는 사회적, 심리적, 경제적, 가족적 요인들은 없는지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골치아픈 환자는 일단 퇴원하면 된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아무리 나를 괴롭혔다 하더라도 

일단 퇴원하면 끝이다.

나머지는 선생님이 외래에서 다 알아서 하시겠지.

내가 오더 하나를 안내서 외래에서 선생님이 당황하신다 해도

일단 그건 내 손을 떠난 일이다. 

그 정도는 혼나고 던지면 그만이다.

그런 골치아픈 환자가 퇴원을 할 때, 

혹은 그런 문제투성이 환자를 놔 두고 다른 파트로 옮겨갈 때 얼마나 속이 시원했던가.



내 이름으로 외래를 보고 입원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할 무렵 

레지던트 초반 그 당황스러움이 떠오른다.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제 조금은 나아졌다.

환자를 대하는 것도, 의학적 지식도, 내 마음의 여유도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어디서 열을 받을 것인가 하는 지점도 많이 달라졌다.

환자 편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의사가 되어가는 것 같다. (아직 멀었다는 말)

그래서 이제는 쉽게 때려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된다.

사는게 쉽지 않고 어떤 직업도 녹녹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냥 감수해야지, 받아들여야지 그런 마음을 갖게 된다.



그 럼 에 도 불 구 하 고



진짜 때려치고 싶을 때가 있다면



그것은 환자가 내 마음을 몰라주거나 혹은 환자가 내 마음을 배신하는 일을 당할 때이다. 

내가 성의를 다해 진료한 것에 대해 

민원을 제기하고 환불을 요청하고 심지어 고소를 하는 일

혹은 나를 오해하고 비난하는 일을 당할 때면 

입에서 단내가 난다.

내가 이럴려고 그렇게 애를 썼었나


그런 마음은

윗사람에게 당하고 욕먹고 부당한 대접을 당하는 것과 상대가 안된다.

몸이 힘든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왜냐면

환자는 의사에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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