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다시 의사하면

슬기엄마 2013. 4. 29. 12:20

다시 레지던트를 하게 되면 무슨 과를 할까?

다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의사를 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난 의사를 하고 싶다.


이제 다 나았어요.

검사 결과가 좋습니다.

수술을 다 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막힌 혈관을 잘 뚫었습니다.

내시경 검사 하기를 잘 했네요. 궤양이 있었군요. 약을 잘 드시면 완치될 수 있습니다.


좋아졌다

완치되었다

그런 말을 하면 환자들이 좋아한다.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나도 좋다. 보람이 있다.

허리가 아팠는데 내가 준 약을 먹고 허리가 안 아프고

속이 쓰렸는데 내가 준 약을 먹고 속이 안 쓰리고


그렇게 뭔가 환자를 좋아지게 하면 환자도 좋고 나도 좋다.

나쁜 일이 있어도 마음 속에 묵혀놓지 않고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홈런타자가 늘 홈런을 치는가? 세번 타석에 서서 2번 삼진아웃 당해도 한번 홈런을 칠 수 있으면 그는 대 타자다. 인생에서 너무 많은 것을 이룰려고 할 필요는 없다. 적절한 시점에 안타를, 적절한 시점에 도루를, 어떨 때는 볼넷으로, 심지어 상대팀의 실책으로 병살의 위기를 넘기고 가는게 인생이니까 다 좋지 않아도 괜찮다. 

마음 속에 묵혀놓은 감정과 짐들이 있어도

털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있기만 하면

그 정도는 받아들여야 하는게 인생이니까. 



그런데 종양내과는 하고 싶지 않다.


좋다는 말, 완치되었다는 말 그런 말을 할 일이 별로 없다.

전이성 암은 치료하면서 좋아졌다고 말해도 그것이 계속 유지되기 어렵다. 약제 반응에 따라 오랫동안 같은 약을 쓰면서 좋은 상태로 유지될 수는 있지만, 그 상태가 영원무궁토록 계속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나빠졌다는 말을 해야 한다. 환자 누구도 그런 미래가 올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내가 좋아졌다고 해도 마음 놓고 좋아하지도 못한다. 나빠지지 않았으니 다행이지만, 늘 머리 속이 복잡하다.


환자에게 그런 말만 하는 내가 싫다.

보람도 없는 것 같다.

허무한 것도 같다. 


봄 타나?


오늘 하루 안 아프게 

오늘 하루 잠 잘자게

오늘 하루 마음 편안하게

그렇게 하루라도 편히 계실 수 있게 해드리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몫이다.


나는 환자에게 좋아지게 해주겠다고 더 큰소리 치고 허풍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만 믿고 하라는 대로 하면 다 좋아질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혼자 마음 속으로 나에게 당부를 할 뿐이다. 

(제가 최선을 다할테니 기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