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선생이라는 자리

슬기엄마 2013. 4. 29. 01:46


어떤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적이 있다.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뭘 가르쳐 줄려고 하지 않아도 

본인 스스로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면 

학생이고 레지던트고 다 따라 배우는 거라고

그렇게 배우는게 더 중요한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본인의 모습에 자신이 없을 땐 아랫 사람이 따라 배울 것이 없으니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가 없다. 뭔가를 애써서 가르쳐 주어야 나의 허물을 가릴 수 있다. 


그렇게 가르쳐 주는 것 마저도 제대로 못하고 시간을 흘려 보내니

텀을 마치는 레지던트들에게 늘 미안하다.

미안한 마음 때문에 맨날 먹을 것만 사주는데, 그것도 참 면목없을 따름이다.


오늘 그동안 근무를 마치고 다른 파트로 가는 레지던트가 나에게 아로마 향을 선물로 주었다. 

방향제 같은 것인데 아까와서 아직 뜯어보지 않았다. 

그 선물을 받고 보니 참 계면쩍다. 

년차가 높다는 이유로 알아서 하겠거니 하면서 별거 가르쳐 준 것도 없고 신경도 별로 못 써줬다. 

그런데 왠 선물?


의사 박경철이 쓴 글 중에

엄마가 위암으로 돌아가신 남매 이야기가 있었다.

엄마의 임종을 앞둔 몇일 동안, 의국으로 남매를 불러 라면을 먹이고, 임종 순간에는 엄마 생각해서 잘 살라는 얘기를 해 줬다는, 그러나 본인은 정작 별로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하지 못했다는데, 나중에 신부가 되어 나타난 오라버니를 만나 그 시간을 떠올리게 된 이야기였다. 그 글을 읽고 숨죽이며 눈물을 참았다. 박경철씨가 그 남매를 대한 인간다움도 그렇지만, 그렇게 절실한 순간에 의사의 한 한마디 말이 한 사람에게는 평생을 좌우하는 말로 남았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평소 말을 별로 아름답게 하지 않는 나로서는 많이 반성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은 깊은 상처 혹은 깊은 감동을 주게 된다.

의사라는 직업상 일차적으로 환자에게 그런 존재가 되기 쉽겠지만

큰 병원에서는 학생이나 레지던트에게도 그런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당장 눈앞의 할일이나 내 사사로운 일들을 해결하는데 짓눌려 

그들에게 별로 신경도 못 쓰고 무관심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니, 

정작 인생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얼마나 무심한가 깨닫게 된다.

내 삶에 정작 중요한 것으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

반성이 된다.


방금 후배의 편지를 받았다.

그에게 나는

나의 본질과 무관하게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나 보다.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의 허상을 보면서 롤모델로 생각한다고 하니

그의 마음 속에는 아마 나의 실체가 아닌 좋은 의사상이 이미 잘 심어져 있는 것 같다.


요즘 나름대로 공부를 좀 하고 있는데

공부를 집중해서 하다보니 세상사와 주변 일에 무심해 진다.

환자를 보는 마음도 둔감해지는 것 같다.

 

그런 일들을 균형있게 하는 것 또한 인생에서 배우고 노력해야 하는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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