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학부 때 물리를 전공으로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때는 공부를 거의 안하고 사진에 미쳐서 나돌아다녔기 때문에
자연과학을 전공했다고 말하기가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하게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래서 대학원을 사회학과로 가게 되었고
비로소 공부다운 공부를 좀 한 것 같다.
물론 지금은 그 때 내가 무슨 공부를 했었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삶의 태도와 가치를 배웠고 철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 때 난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 정신과 태도만이 남아있을 뿐이지, 학문적인 내용은 기억도 안난다. 요즘에는 사회과학책을 읽으면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한글인데도 읽기 어려운 그런 수준으로 전락했다. 책을 취사선택해서 골라 읽기조차 어렵다.
그런 내가 의대에 와서 종양내과 의사가 되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의사도 참으로 경쟁적인 직업이다.
아마도 개업을 하면 온 세상을 상대로 더 경쟁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종양내과는 개업을 할 수 없는 과이니 개업은 고민의 축에서는 좀 멀리 있고 실정을 잘 모른다.
이렇게 대학병원에서 취직해서 월급받으며 먹고 살아야 하는 의사의 입장에서 보건데,
대학병원은 의사는 이제 단지 환자만 봐가지고는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소위 '연구'라는 걸 좀 해야 한다. '연구'도 하고 '논문'도 써야 객관적으로 존재의 의미가 입증된다. 물론 진료한 '환자수'로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지만, 현행 보험수가에서는 환자를 아무리 많이 봐도 수익률이 낮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존재감에 별 도움이 안된다. 과에 따라서는 심지어 환자를 많이 볼수록 손해가 되는 경우도 있어서, 이제 환자 많이 봅네, 수술 많이 합네, 그런 걸로 어깨에 힘주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저널 점수에 따라 인센티브도 다르게 나오고 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달라진다.
논문을 쓰는 것 말고도 자기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연구비를 따야 하는데, 연구비도 결국 빈익빈 부익부가 되어, 잘 나가는 저널에 한번 내면, 연구비 수주도 성공적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3년에 몇천만원짜리 연구비도 따기 어렵다.
오늘 우리 병원에 새롭게 들어선 연구센터에 구경을 가봤다.
출입증도 없이 촌스러운 나, 임시출입증을 발급받아 첨단 연구동에 들어가봤다. 깨끗하고 좋아보였다. 공동 기자재도 있고, 랩 별로 가지고 있는 기계도 많아 보였다. 연구실 대여료가 벤치 수에 따라 1년에 몇천만원이라고 한다. 그 규모를 보건데 큰 국책과제를 딴 명망있는 연구자들만 입주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파이펫 한번 잡아본 적 없는, 이런 연구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다. 누구나 다 랩을 하고 실험연구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본업인 환자 진료를 하다 보면
아, 이거 정말 왜 이러지? 이런건 연구 좀 해봐야 하는데...
아, 이런 건 정말 설명이 안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거지?
이 약은 원래 기전 말고 다른 기전으로 환자의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것 같은데 그 원리가 뭘까?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관련 주제를 다룬 기존 연구 논문을 찾아보고 또 혼자 공부해보고 우리 현실하고는 뭐가 안 맞으니 뭘 더 해보는게 결론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겠다 뭐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편다. 또 그런 생각들이 쌓이면 나도 직접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해 본다.
그러나
금방 좌절하고 현실을 깨닫는다.
실험과 연구의 경험이 없는 나의 문제제기는
실험 세팅에 맞지 않게 방대하고 큰 과제를 지향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문제의식의 레벨을 조절하여 뭔가를 해 보려고 해도
그 실험을 해줄 사람, 실험공간, 실험장비, 시약, 검체 등등의 시공간, 사람, 돈이 없다.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그 분야를 잘 하는 연구자들과 공동연구를 하는 것인데
나같이 피래미 의사, 경력도 경험도 없는 의사가 누구랑 네트워킹을 하겠는가.
나는 공동연구를 할만한 자질이나 자격이 안된다. 공동이라 함은 나도 뭔가 상대방에게 기여를 해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난 기여할 능력이 없다.
바람직한 것은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멘토, 그 스승님 아래서 일하는 것이다.
스승님이 시키는대로 열심히 하면서 알게 모르게 배우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효율적이고 걱정도 적고 쓸데없는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난 박터지게 외래환자를 보는 것으로 임상조교수 일을 시작했고
학문적이고 연구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전혀 없다가
환자를 보면서 거꾸로 관심을 갖게 된 터라
내 앞에 그 누구도 없다.
내가 알아서 돈도 모으고 사람도 만들고 그래야 하는 것이다.
내 처지가 그런 것을 누구에게 한탄하겠는가.
암정복 어쩌구 하는 국책과제 공모 메일이 날라왔다.
헉, 내 관심분야가 있네. 한달 정도 준비기간이 있으니 열심히 준비해서 나도 연구비를 좀 따볼까 하는 마음에 좀 흥분이 됬다. 연구계획서를 쓰는 것은 논문을 쓰는 것 만큼 고민을 많이 하고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지만, 돈없는 나에게 2천만원이라니, 정말 혹했다.
그렇지만 오늘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그건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낸 과제라고 한다.
- 이런 걸 쓰면 또 누군가에게 시비당하는거 아닌지 모르겠다 -
일은 공식적으로 진행되지만 사실 사전 정지작업이 다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 그런 일은 비일 비재하기 때문에 특별한 감정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그런거라고 다들 말하지만
기분이 별루다.
나에게 능력이 많으면
나에게 투자해 보라고, 나를 위해 연구비를 후원해 달라고,
당신의 후원과 기부금이 한국 의료의 앞날을 밝히는데 귀한 등불이 될거라고
당신은 거기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나를 광고하겠는데
그것도 아니니 더 찌그러진다.
에잇, 내일 외래 준비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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