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박쥐처럼 지낸 1년

슬기엄마 2011. 2. 27. 21:56

박쥐처럼 지낸 1

 

지난 1년 내내 나는 크게 두 갈래의 길을 저울질하며 지내왔다. 의료사회학에 대한 나의 애정, 이 분야 연구에 대한 욕심, 완성되지 못한 박사학위논문 등사회과학자로서의 나, 그리고 병원에서 만나는 환자들과의 관계, 한국 의료제도의 비효율성, palliative medicine totally comprehensive care에 관심이 많은의사로서의 나.

나를 아는 사람들 혹은 청년의사 애독자들의 평을 종합해보면내 사고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는 것 같다’, ‘점점 의사가 되어가는 것 같다는 것이다
.

의사들이 내 글을 재미있어 한다면, 자신도 겪어왔던 인턴시절의 추억이 묻어나거나 의사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법한 심정이 제대로 표현되어서 그럴 것이리라. 의사가 아닌 사회학자로서 아무리 자세히 인터뷰하고 설문조사하며 참여관찰을 해도 알기 어려운 병원과 의사의 삶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런 호의적인 반응을 접할 때면 한편으로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대 입학 이전의 내 정체성과 학문적 열의가 흔들리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도 하다
.

지난 1년 동안 두세 번 정도 참여했던 사회학과 동료들과의 세미나. 이제는 낯설어진 사회과학 용어, 변화된 이론의 지형,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평 등 끼여들 자리가 없었다. 간혹 내가 발언할 수 있는 시간은누가 어디가 아프다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 ‘병원에서 이런 일을 경험했는데 이건 과연 누가 잘못한 거냐’, ‘의사들은 도대체 왜 그러냐는 류의 질문이 던져졌을 때 정도였다. 사회학과 사람들을 만나면의사가 되어, 병원에서는사회학을 공부한의사가 되어 박쥐처럼 지내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도 많다
.

의대 입학 전, 그리고 인턴이 된 후, 나를 지켜보겠다고 말한 이들이 꽤 많았다. 그 관심의 이면에는 사회과학자로서의 내 모습이 어떻게 소멸할 것인지를 지켜보겠다는 날카로운 지적이 숨어있음을충분히느낄 수 있었다
.

그런 내가 근본적이고 정통적으로 의료를 구현한다는 내과를 선택했으니, 당장 내 눈앞에서 saturation이 떨어지는 환자 intubation을 제대로 못 하거나 BP가 떨어지는 환자의 central line을 잽싸게 잡지 못 하면 환자를 잃을 수도 있는 마당에, 의료사회학이고 나발이고 그런 호사스러운 고민은 뒷전에 던져두라는 핀잔을 듣게 될 것이다
.

당분간은 내가 설정한 미래의 양 축 가운데 의사로서의 삶에 집중하여 살아야 할 것 같다. 내 꿈과 이상이 무엇이든 나에게 자기 존재의 모든 것을 맡긴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결심을 하게 되기까지 나에게는 진통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

이제 어엿한 30대 중반인데, 약간 돌아가는 듯한, 혹은 인생을 뭉그적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회학과 동기들이 근사하게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하고 젊은 연구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전임강사 발령을 받고 인턴이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운 자리에서 일하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스태프를 볼 때면, 그 어떤 길에서도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불안해 보인다
.

해답은 이미 알고 있다. 5년 혹은 10년 후, 지금의 문제의식을 잃지 않고 나의 과거력이 보증하는 새로운 분야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당면한 나의 현재를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일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당분간 병원이라는 잠수함을 타고 지내야 할 시간들에 대해 너무 아쉬워할 필요 없다는 것.

'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 레지던트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Research에 관하여  (0) 2011.02.27
문의전화를 받다  (0) 2011.02.27
응급실로 돌아온 환자  (0) 2011.02.27
의사와 간호사  (0) 2011.02.27
과연 주치의 일기를 쓸 수 있을까?  (0) 2011.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