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주치의 일기를 쓸 수 있을까?
“내가 1년 전에도 이랬어?” “아니, 너 의사 다 됐다.”
나는 ‘아주 가끔 만나는’ 남편과 병원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남편은 내가 병원에서 발견하는 불합리한 일들, 내가 잘못해서 상황이 악화된 일들, 환자와 보호자, 동료 및 선후배 의사, 병동 간호사들과 있었던 온갖 해프닝들에 대해 마음 터놓고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신은 좋겠다.” “왜?” “전문의니까.” 나의 대답에 어찌나 껄껄대며 웃는지. 나의 모든 일상을 이해해주고 조언해주고 때론 같이 흥분하며 동조해주는 남편이 정말 고맙다.
그와의 대화에서 지난 1년간 나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내가 무엇에 대해 분개하는지, 무엇을 참을 수 없어 하는지,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남편은 내 사고의 변화를 읽어내는 사람이다.
Pre 1년차 syndrome. 나는 그 전형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 뭔가 잘 해보려고 하지만 하는 일마다 예상치 못한 펑크가 나고, 윗년차 선생님이 꼭 챙겨야 한다는 일은 꼭 빼먹는다. 그래서 혼나면 위축되고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된다. 늘 마음은 불안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정작 책을 펼치면 졸고 있거나 딴 생각을 하는 잡스러움,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책감, 그리고 콤플렉스. 나는 그런 소심함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청년의사로부터 인턴일기에 이어 주치의일기를 써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네 일이나 잘해’라는 누군가의 냉혹한 목소리였다. 이제 1년차가 되어, 낮에는 내가 속한 파트의 환자들을, 밤에는 당직의사가 되어 내가 잘 모르는 환자의 vital sign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 된다. 맺고 끊어짐 없는 24시간의 연속. 매일의 회진, 의국회의, 중환회진 등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나의 실수와 오류들이 공개되는 시간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나에 대한 평가. 나는 그런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내 생각을 글로 쓸 수 있을까? 글을 쓴다는 행위에서 요구되는 냉철함이나 심호흡을 내쉬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나에게 허락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은 ‘아니올시다’인 것 같다.
그런데 나는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청년의사 편집국의 강권과 ‘가장 인기 있는 코너’라는 감언이설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기’라는 단어의 매력 때문이다. 내 인생에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지금의 1년을 일정한 주기로 돌아보며 내 생각을 정리해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자기 할 일을 물샐틈없이 잘 해내는 슈퍼레지던트이기 때문에 글을 쓸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리라. 어쩌면 글을 쓰기 위해 나의 삶과 시간을 좀더 냉철하게 관리하고 나 스스로를 분석할 수 있으며 내가 속한 병원과 의사 사회에 대해 숙고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이 내가 다른 사람과는 조금은 다른 경로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생활을 하는 지금의 상황에 의미를 부여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의 일기는 조감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구상중인 설계도를 그리는 편에 가까울 것 같다. 나는 아마도 앞으로 1년 동안 한 순간도 마음놓을 수 없는 주치의 시절을 걷게 되리라. 어쩌면 이 일기는 계속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번 도전하고 싶은 마음 가득하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질책을 기다리며 용기를 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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