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연말연시 뜻깊은 메일과 문자

슬기엄마 2012. 12. 31. 21:44

 

 

이메일이나 문자가 정성이 좀 부족한 듯 해도

전 이게 어디냐 싶어요.

 

손편지, 카드를 일일히 챙기지 못하는 저로서는

이렇게 한해의 마지막 날,

허겁지겁 불끄듯 메일과 문자로 인사를 전합니다. 초치기 새해인사에요.

 

제가 유명인사가 아니니 일괄적인 안부인사를 돌릴 건 없구요. 

그냥 내 마음 가는데로 인사하면 됩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도,

소원해져서 좀 썰렁해진 사람에게도,

늘 보는 사람에게도,

본 지 한참 된 사람에게도,

불현듯 문자와 카톡과 메일을 보내봅니다.

 

오늘 종양내과 보험심사과  담당 선생님의 메일을 받았어요.

우린 매일 항암제 보험삭감 관련하여 매일 전화를 주고 받고 업무상 메일을 보내며 밀접하게 연결된 관계입니다. 

오늘 제가 먼저 메일을 보냈지요. 한해 동안 감사했다고.

선생님 덕에 빵꾸 안내고 진료 잘 할 수 있었다고.

 

의사 입장에서 보면 보험심사과는 사실 기분 나쁜 파트이기도 해요.

막 말로

의사 처방이 나가고 나면,

그렇게 하면 삭감된다, 처방 변경해라, 그 약 쓰면 안된다, 얼마 삭감되었으니 방어하는 소견서 써라. 그 약 꼭 쓰고 싶으면 경과기록에 무슨 무슨 내용이 들어가게 기록을 잘 남겨야 한다....

그렇게 진료와 처방에 관한 의사의 전문성을 침해하는(!) 연락을 하는 곳이죠.

 

레지던트 때는 그런 전화를 받으면 불처럼 화를 냈어요.

 

그건 의사의 권한이다, 환자는 내가 책임지는 거다, 지금 이 약 꼭 써야 한다, 환자 나빠지면 보험심사과가 책임질거냐, 부질없이 보험심사과 담당 직원에게 화를 내곤 했죠. 그러나 알고 보면 이들의 지적은 현행 보험제도의 틀 하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제도적인 문제이자, 심평원의 지적 사항이기도 한 거에요. 우리 병원 보험심사과의 문제가 아니라요.

 

저도 슬슬 병원 생활에 경력이 쌓이고

의사가 일을 잘 하려면,

환자를 잘 보려면,

병원 행정파트 직원들과도 협력이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예전보다 좀 더 겸손해지고,

행정하시는 분들 입장도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의사 입장에서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이 뭔지에 대해

보다 부드럽고 융통성있게 주장할 줄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정이 든 곳이 우리병원 보험심사과입니다.

 

이제 어떤 상황에서 삭감이 되는지 대충 알기 때문에 처방을 하기 전에 미리 전화를 겁니다.

 

이러이러한 상황인데 삭감될거 같아요?

 

선생님, 어떠어떠한 조건은 어떤 상황인가요?

꼭 써야 할 것으면 무슨 검사를 해 보고 어떤 결과가 나오면 삭감없이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그 검사할만한 여력이 되나요?

 

아니요. 환자 경제적 형편이 어렵고 몸 상태도 안 좋아서 그 검사하기는 어려워요.

 

그럼 이렇게 이렇게 해보는 건 가능할까요?

 

아니요, 그것도 어려워요. 왜냐면...

 

실재 환자에게 검사와 약을 처방하기 전에

종종 보험심사과와 상의하곤 합니다.

현행 보험시스템 하에서

환자에게 유리한 조건을 찾고, 보험이 안되면 편법을 발견하는 노력을 해서라도 삭감없이 티 안나게 처방을 해보려고 노력해 주십니다.

다른 병원 사례를 찾아서라도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도 찾아주시고,

가능하면 의사의 전문성을 침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의사의 원래 취지를 잘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보험심사과 담당 선생님들이 안된다고 하면 저도 이제 쉽게 그 답변을 받아들입니다. 그만큼 비슷한 사례를 많이 논의했기 때문에 이제 공감대도 높아졌습니다.

 

지금은 보험심사과에 계시지만 예전에 병동에 간호사로 일하실 때 레지던트로 일하는 저를 본 적이 있으신가봐요. 오늘 답장에는 그 때 이야기들을 하시네요. 정말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화끈!

 

'안돼요, 삭감될 거 같아요' 그런 말 하게되어 죄송했다고,

그래도 내가 꼬치꼬치 캐묻고 따지는 건 다 환자를 위해 그런 거였다는 거 충분히 이해해주신다고,

 

그렇게 저에게 감사함을 표해주시니

그간 별로 태도가 좋지 않았던 저로서는 부끄러울 따름.

 

환자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병원 곳곳에서 간접적으로 환자 진료를 지원하는 분들이 많다는 점에 저는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과 뜻을 모아 일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오늘 밤 안부인사는

겉으로만 하는 인사치례가 아니라

정말 고마웠던 사람에게 진심으로 인사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우리 환자들에게도 딩동 딩동 문자가 오네요.

카톡에 하트를 담아 문자를 보내주시네요.

이렇게 연말연시 생각나는 사람이 나라니, 마음에 약간 부담도 되지만 좋습니다.

의사니까 받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 환자들 모두에게 인사드립니다.

 

새해라고 별거 없습니다.

그냥 지금처럼 열심히 삽시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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