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바쁜 엄마. 일주일에 한두 번 자기 전에 잠깐 만나는 게 전부다. 내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의대생,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하고 있었고 집에 안 들어와도 별로 이상할 것 없었다. 많은 일을 외할머니와 상의하며 지내는 것이 당연했다.
엄마와의 관계는 여러 모로 소원해지기 쉽다. 엄마는 내가 요즘 무슨 공부를 하는지, 어느 학원에 다니는지, 입시를 어떻게 준비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엄마와 직접 만나지는 않아도 같이 하는 일이 생겼다.
학교 글짓기 대회나 논술 숙제, 자기 소개서 등 글 쓸 일이 있을 때 엄마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저녁에 집에 계시는 아빠에게 조언을 부탁했지만 “응, 잘 썼네~” 외에는 평가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엄마는 주제가 뭔지, 왜 이걸 써야 하는지, 핵심이 뭔지, 스토리는 어떻게 잡을 것인지 그런 것들을 먼저 전화로 얘기해보고, 글을 써서 메일로 보내라고 하신다. 그리고 내가 보낸 원고를 보고 다시 전화하신다.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다른 내용을 첨가해봐라, 어떤 부분은 별로이니 빼라는 등 코멘트를 하신다. 그럼 나는 또 써서 메일로 보내고 엄마는 또 코멘트 하는 그런 일상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시작하는 부분부터 엄마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점차 스스로 쓰고 엄마가 지적한 사항에 따라 내용을 보태고 빼면서 바꿔 쓰는 훈련이 된 것 같다. 그런 식으로 2년 정도 여러 주제에 관해 글쓰기를 하게 됐다.
올해, 3학년이 돼서도 몇 차례 글짓기 대회가 있었고 여느 때처럼 먼저 글을 쓰고 엄마에게 메일로 보내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매번 도움 받는 것보다는 스스로 완성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아예 엄마에게 말하지 않고 초고부터 마무리원고까지 끝내서 학교에 제출했다.
주제는 양성평등. 이어서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글짓기 대회가 있었는데 그 주제는 호국보훈이었다. 내가 평소에 전혀 관심을 두거나 생각해보지 않았던 주제라 어쩔 수 없이 엄마의 도움을 받았다. 엄마도 난감해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셨고, 나는 어찌어찌 또 글을 써서 제출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엄마의 도움을 받았던 호국보훈 글짓기가 아닌, 내 의견으로 완성한 양성평등 글로 상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상을 받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지만 내 실력이 엄마가 수정해 준 글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내 힘으로 온전히 썼다고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엄마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글쓰기 훈련을 했던 것, 이런 글에서는 읽는 사람에게 어떤 점을 강조해야 하는지, 어떤 예를 들 것인지 등을 나도 모르게 배운 게 아닐까? 엄마가 직접적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고 알려 주지는 않았지만 그 조언을 들으면서 무의식 중에 글을 잘 쓰게 된 게 아닐까?
평소 엄마랑은 연락도 자주 하지 않는다. 엄마는 집에 몇 시에 오는지를 전화하는 정도. 가끔 엄마가 카톡으로 놀자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낼 때도 있는데, 난 학원이나 다른 스케줄 때문에 엄마에게 퇴짜를 놓는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도 ‘이따 전화할게’ 라며 끊는 경우가 잦은 것에 대한 복수! 그렇게 바쁜 엄마지만 내 글쓰기에 관련된 내용만큼은 메일을 보내는 즉시 읽어보고 답장을 준다. 바쁘다면서도 내용 보충을 위해서는 통화도 자주 한다. 엄마는 글쓰기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글쓰기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읽는 사람을 고려하고, 목적에 맞게 쓰는 방향을 바꿔야 할 때가 많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고민하고 싶지 않은 주제에 대해 글을 쓸 때는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그렇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를 주변에 맞춰나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 어떻게 보면 사회에 나가기 위한 연습이 아닌가 싶다. 매달 청년의사에 글을 쓰느라 엄마와 함께 아이디어를 쥐어짜며 약간은 힘들게 쓰고 있지만 생활을 돌아보며 소재를 찾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다른 일보다 글을 쓸 때 유독 불평이 없는 것도 언제나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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