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행복한 여름 한 달 - 슬기의 일기 8

슬기엄마 2012. 9. 12. 17:00

 

8월 한 달은 마음이 즐거웠다. 방학이라 그런 게 아니다. 사실 중3 여름방학은 학교생활을 할 때보다 더 팍팍한 학원 일정에 매여 살아야 한다. 난 그래도 즐거웠다. 방학을 하자마자 미용실로 달려갔는데, 그것도 동네 미용실이 아니라 신촌에서 엄마를 만나 꽤 좋아 보이는 미용실에 가서 염색을 하고 왔기 때문이다.

내 또래들 누구처럼 나도 패션에 관심이 있다. 코디네이션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거나 심혈을 기울여 스타일링을 하는 건 아니지만, 결코 아무거나 막 입지 않는다. 주말에는 외출하는 아빠에게 어울리는 옷차림을 추천하기도 한다. 아빠의 패션감각은 영 아니다. 엄마가 신경을 써 주는 것도 아니고. 사실 엄마의 패션감각은 더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기대할 수 없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내 선택은 레드브라운.

염색 결과가 만족스럽다. 한 달 내내 거울을 볼 때마다 즐거웠다. 친구들한테 머리 색이 잘 나왔다는 말을 듣는 것도 좋았다. 내 친구들은 방학하기 전부터 염색이나 파마를 하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는데, 실제로 방학 이후 헤어스타일을 바꾼 친구는 거의 없었다. 하고 싶어도 부모님의 반대로 퇴짜를 맞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학원에서 만난 친구들은 부모님이 그렇게 쉽게 염색을 허락해 주시냐며 부러워했다. 그것도 신촌 미용실로 불러서 염색하는 곳에 같이 가다니.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개학 직전 다시 검정색으로 염색하기 위해 미용실을 찾았다. 그런데 웬걸, 염색을 다시 했더니 머리 색은 한층 붉은 빛을 띠게 됐고 등교하자마자 담임선생님께 경고를 먹었다.

외할머니는 염색한다고 할 때부터 한 달이 지나 다시 까맣게 염색한다고 할 때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지금 집중해서 공부해도 시원찮을 판에 관심을 어디다 두는 거냐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게 분명하다. 게다가 까맣게 한다고 한 염색이 더 밝은 색으로 변해서 또다시 미용실을 가게 생겼으니 시간이며 돈이며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호통치기 직전이다. 그런 할머니와는 달리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까맣게 해달라고 하면 되지 뭐” 라며 미용실을 다시 예약하겠다고 한다. 결국 파마/염색 처벌 유예기간이 끝나기 직전, 나는 다시 미용실에 가서 모범생다운 검정색 머리로 돌려놓고 왔다.

작년 여름방학에도, 이번에도 엄마는 흔쾌히 염색을 허락해 주셨다. 머릿결 상하면 안 된다고 비싼 걸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걸 다 해 봐야 한다는 엄마의 신념 덕분이다. 엄마는 내 고등학교 진학 문제에 관해서, 혹은 지금 무슨 공부를 하고 무엇을 준비하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도 한번 사는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보다 오랫동안 많이 고민하고 다양하게 경험해 본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내게 요구하는 게 다른 엄마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가끔 받게 된다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할 때는 똑같다). 다른 엄마들처럼 일상적으로 가깝게 생활을 같이 하는 건 아니지만 나에 대한 엄마 특유의 관심과 기대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자기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그걸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만 안다면 염색 좀 해도 되고, 스마트폰 좀 해도 되고, 멋 좀 내도 되고 일요일 밤 개그콘서트도 좀 봐도 되고. 그런 건 내 자율에 맡긴다. 그런 엄마가 가끔 멋지다고 생각한다. 땡큐, 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