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누구든 내 환자처럼

슬기엄마 2012. 9. 11. 21:42

 

 

집이 강릉인 나의 몇명 안되는 총각 환자.

내가 레지던트 3년차 때부터 알던 환자다. 아주 드문 타입의 암이라, 별다른 치료약도 없고, 나빠지는 속도도 아주 느리다. 조금씩 조금씩 나빠지고 있어서 너무 적극적으로 치료할 필요 없다. 이미 해볼만한 치료는 다 해보기도 했거니와.

그렇지만 최근 뱃속 림프절에만 주로 모여있던 병이 몇달 전부터는 간에도 전이가 되었다.

 

이 총각은 말이 별로 없고

아파도 아프단 말을 잘 안한다.

자기 병을 잘 아는지 CT 찍고나서 내가 병이 좀 나빠졌다고 해도 별 말이 없다.

다음 계획도 묻지 않는다.

너무너무 아프면 병원에 와서 '좀 아파요' 그정도 표현한다.

오래 아파서 진통제도 잘 조절해서 먹을 줄 안다. 그런 그가 아프다고 하면 아주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아프다는 말을 잘 안하는 사람이 아프다고 말한거니까.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성격도 과묵하여 아주 멋진 총각이었는데

병이 오래 가니 많이 상했다. 그래서 그를 보는 내 마음이 언제나 안쓰럽고 안타깝다.

 

얼마전 미루고 미루다가 항암치료를 다시 했다.

내가 결정한 항암 요법은 매우 독성이 강한 약제 조합이었다.

뭘 해도 효과가 없으니 고전적인 오래된 약제 조합으로 치료를 하게 되었다.

그는 항암치료 2싸이클 하고 나서 살이 20kg이나 빠졌다.

.

그래도 복수도 줄고 숨찬 것도 좋아졌는지 본인도 계속 해보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CT를 보여주면서 - 최근 들어 오랫만에 CT를 보여주었다. 좋아진 거 보여주고 싶어서 나빠지면 사진을 잘 안보여줬다 - 간이 많이 좋아졌다고 설명해주니, 그는 씩 웃고 그만이다.

 

그동안 항암치료 하면서 열이 나도 하루이틀 잠깐 고생하다가 좋아졌다며 외래에 잘 오지 않으려고 한다. 병원 다니는 생활이 지겨운지 왠만하면 안 오려고 한다. 

나도 강릉 사는 환자를 혈액검사 수치한번 확인해 보자고 서울 오라고 하는 것도 미안해서 강릉에 있는 종합병원에 가서 피검사 하라고 소견서를 써서 보내줬는데, 그때 목아프다고 했는지 이비인후과에 가서 목 안만 들여다보고 항생제도 처방안해주었다고 한다. 종양내과를 가야하는데...

 

그래서 이번에는 소견서를 써서 환자 편에 보내면서 미리 병원과 의사 정보를 확인해서 어떤 한 선생님을 미리 정했다.

그 선생님 메일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내 미리 상황 보고를 드리고, 백혈구 수치 떨어질 때 외래 가면 잘 좀 봐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내가 외래를 가라고 지정한 날이 미처 안되었는데,

환자가 열이 나고 힘들었는지 금요일 오후 외래가 끝난 시간에 그 병원을 갔나보다. 금요일 오후 5시 20분.  외래 끝나고 주말이면 선생님 못 만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환자는 혈압이 떨어져서 중심정맥관을 삽입하고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나에게 메일도 보내주시고 문자도 보내주고 계신다. 심지어 오늘은 그동안 열 패턴이랑 백혈구 수치 변화를 보여주느라 EMR  화면을 캡처해서 보내주셨다.

 

혈압은 어떤지

중환자실에서 언제 나왔는지

뭘 먹고 있는지

컨디션은 어떤지

시시콜콜 형님처럼 환자의 소상한 상태 변화에 대해 상황을 알려주고 계신다. 내가 정말 아끼는 환자라고 했더니 그도 아껴서 나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고 계신다.

 

사실 본인이 처음부터 진단, 진찰하지도 않았고 환자의 긴 병력도 잘 모르고 의사 환자간 신뢰관계도 잘 형성되지 않았는데, 서울에서 환자 좀 봐달라고 보내면, 지방에 계신 선생님으로서 여러 모로 난감한 점이 많을 것이다. 환자들도 자기 주치의한테는 살갑게 굴지만, 잘 모르는 선생님께는 무뚝뚝하고, 예의를 덜 차릴 지도 모른다.

 

얼굴도 뵌 적 없고

어떤 선생님인지도 잘 모르는데

내가 부탁을 했다는 이유로

또 종양내과 의사로서 고생하는 환자를 위해

당연한 일로 신경써서 봐주시는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따름이다.

언제든 학회에서 찾아뵙고 단단히 인사를 드리고 싶다.

정말 따뜻한 밥이라도 한끼 대접하고 싶다. 강릉이라도 한번 가야하나 ^^ 행복한 고민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겉으로 환자에게 친절하지 않고 무뚝뚝해 보여도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선생님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이다.

과를 막론하고.

겉으로 화려하지 않아도

뚝심있고 배짱좋고 마음 따뜻한 선생님들이 아직 많다는 사실이다.

나도

언제 어느 자리에 있든 그런 의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