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동 회진을 돌기 전에
어제 하루동안 찍은 환자들 사진
환자 피검사 결과
열 났는지 안났는지
하루 총 소변량 얼마나 되는지
몸무게 변화는 없는지
그런 사항들을 챙겨보면서
전공의들과 미리 환자 상태에 대해 상의를 한 다음에 회진을 돕니다.
회진 돌기 전에 저는 묻습니다.
이 환자 어때요?
전공의 대답은
때론 맞기도 하고
때론 틀리기도 합니다.
전공의 때는
아직 이 환자에서 뭐가 중요한지, 핵심적으로 챙겨야 하는 정보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애써서 노력해도 헛수고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걸 터득하는게 전공의로 트레이닝받는 동안 배워야 할 덕목이죠.
어떤 환자를 보더라도, 얼마만의 시간이 주어지더라도 신속히 상황 판단을 해서
환자에게는 어떤 정보가 가장 중요하고,
어떤 증상이 가장 의미있는 증상하고,
내가 무엇을 해결해줘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
그것이 전공의 기간 동안 여러 과를 돌면서 배워야 하는 사항들 일겁니다.
빠릿빠릿하지 못한 나,
전공의 수련기간 동안 수도 없이 혼나고 어리버리했습니다.
제가 전공의 1년차일 때 제 동기 중의 한명은
환자 명단 빈칸에 0.3mm 펜으로 깨알같이 환자 정보를 다 적어놓았습니다.
1년차 때는 뭐가 중요한지 모르니까
환자의 모든 정보를 다 적어놓고
선생님이 질문하시면 그 종이를 보고 대답하는 수준입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대비하려는 자세가 기특합니다.
그는
황달수치, 콩팥수치, 몸무게, 소변량, 설사 몇번, CT검사결과 등등
그 모든 것은 깨알같이 다 적어놓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그걸 적으며 회진 준비를 합니다. 한번은 병동에서 그걸 적으며 회진 준비를 하는데, 환자 보고 온다며 잠시 책상을 비운 사이에 누가 그 종이를 치워 버렸는지, 명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선생님 오실 시간은 얼마 안남았는데
열과 성의를 다해
환자의 모든 것을 적어놓은 그 명단이 사라지자
이 친구 이성을 잃고 병동 쓰레기통을 다 뒤집어 엎으며 난리를 치다가
결국 어떤 쓰레기통에서 자기 명단을 찾아냈습니다.
선생님 오시기 직전에.
그 명단을 확보한 후 아무일 없다는 듯이 회진을 돌더군요.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노력하는 동기였다고 생각합니다.
환자를 보는 의사에게 미덕이란 무엇인가.
언제부터인가 그 미덕의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서울대 지제근 선생님이 인터뷰하신 기사를 봤습니다.
의사들이 impact factor의 노예가 되었다고.
인용지수가 높은 저널에 기고하고 채택되는 것만이 의사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의사들이 많아진 것 같다고.
의국 회의 때 혼나면 그게 지긋지긋해서라도 같은 실수 안할려고 이를 갈면서 준비합니다.
선생님한테 혼나면 다시는 잔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 이를 갈면서 준비합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이를 갈면서 준비했던 하루하루가
아마도 지금의 내 모습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질서체계가 되었을 겁니다.
너무 혼 나기 보다는 가끔 칭찬도 받으며
너무 욕먹고 일하기 보다는 때론 존중도 받으며
성장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의 트레이닝 시절,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가 의사생활을 하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하고 무엇을 꼭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
환자를 위해 나는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것은
원리원칙을 강조한 선배 의사선생님들의 잔소리, 그 지긋지긋한 원리원칙에 대한 강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애정을 담아 가르치고
나도 부족함이 많지만 같이 잘하자고 격려하는 사랑의 매를 들 수 있는 선생님이 되어야 할텐데
나는 자꾸 신경질 부리고
화를 내는 윗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 주치의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쓰기를 통해 엄마와 얘기하기 - 슬기의 일기 7 (0) | 2012.09.12 |
---|---|
누구든 내 환자처럼 (0) | 2012.09.11 |
밤이면 밤마다... (11) | 2012.09.03 |
우리는 최고의 콤비 (6) | 2012.08.24 |
아침부터 삭감소견서 (6) | 2012.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