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100인
제가 20년전 처음 대학 다닐 때
그때도 인생 심란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인생은 늘 심란함의 연속인것 같습니다)
그때는 젊고 뭔가 의욕도 많을 때라
심란해도
뭔가를 생산적으로 하면서 위기를 극복해 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까지는 못 쫒아가겠지만
당시 내 인생의 100인을 선정해보고 기록해 보려고 했습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내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현실의/가상의 (소설, 영화 등등) 인물을 선정해보는 거죠.
역사적인 사건도 생각해보고, 위인도 떠올려 100인의 리스트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그가 왜 나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와의 기억이 흐릿해지면
그를 불러내서 다시 만나 이야기도 나눠보고
변한 그를 보며 100인의 목록에서 제외하기도 하고
그를 떠올리기 위해 소설을 다시 읽고
다시 읽은 소감을 정리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나름 건강한 청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도 인생의 위기감을 느낄 때 예전에 작성해 놓은 100인의 명단을 다시 들추어 봅니다.
시간이 지나
꽤 많은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갔고 관계도 멀어졌습니다.
왜 그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나도 변하고 그도 변하고 세상도 변했기 때문이겠죠.
그러면 오늘 날짜를 적고 100인을 다시 선정해 봅니다.
여전히 나에게 중요한 사람으로 남아있는 사람도 있고, 제거되는 사람도 있고, 새롭게 등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나에게 묻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재구성되었을까? 내 삶의 맥락이 어떻게 변하였길래 100인의 명단이 변하는 걸까? 나의 가치기준은 어떻게 변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내 인생의 소중한 것, 내가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들을 약간은 선명하게 분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솔직히
100인을 구성할 수가 없습니다.
나이를 먹을 수록 인간관계가 풍요로워지고 폭넓어지는 게 아니라
피라미드의 위쪽으로 올라가 모양이 뾰족해 지듯이
점점 내 주위의 사람들이 줄어들고 관계도 협소해 집니다.
그냥 아는 사람들은 많아지지만
사랑과 우정과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듭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걸 별로 아쉬워 하지는 않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30인 정도나 열거할 수 있을까요?
누구의 말씀처럼
밤한톨이 익어가는 데도 그냥 되지 않고
비도 천둥도 햇살도 가뭄도 장마도 필요하다고 하네요.
그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바로 오늘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그 모든 이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가족에게 감사합니다.
항상 그 명단에 변치 않고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 중에 누구라고 지칭할 수 없는 나의 환자들이 크게 자리잡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의사로 살아가는 내가
처음의 뜻을 잃지 않게, 자꾸 게을러지는 나를 공부시키고, 나의 부족함을 각성시키는 환자들이 한 자리 잡은 것을 보면
제가 의사가 되긴 되었나 봅니다.
이 명단을 작성하는 일이 사실 마음 가벼운 일은 아닙니다.
견디기 시리즈 1탄은 좀 가벼웠죠. 2탄은 좀 무겁습니다.
가볍게도
때론 무겁게도
견뎌야 하는 것이
삶의 본질인가 봅니다.
그래도 한번 작성해 보세요.
그리고 버리지 말고 보관해 두세요.
1년만 지나서 다시 보아도
많은 것이 변해있음을 깨닫고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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