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이불을 선물로 받다

슬기엄마 2012. 5. 31. 14:36

드디어

난 오늘

이불을 선물로 받았다.

내가 받은 가장 인상적인 선물 넘버원, 빤스 2벌을 누르고

이불은 가장 인상적인 선물로 등극했다.

나는 보자기를 열어보고 빵 터졌다.

딸이 사준 거라며 엄마환자가 놓고 간 선물이다.

내가 뭘 이런걸이렇게 말하기도 전에 그냥 놓고 나가버렸다. 아주 어색해 하면서.

내가 간간히 연구실 라꾸라꾸에서 자는 걸 딸이 눈치챈 것 같다.

여름용 라꾸라꾸 커버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짱아찌도 받았다.

5년째 호르몬치료를 받고 있는 뼈전이 유방암 환자.

안정적으로 치료를 잘 받고 계신다. 그래서 별로 할 말도 없다.

그냥 스케줄대로 한달에 한번씩 뼈주사도 맞고 호르몬제를 타가신다.

그렇게 별로 말이 필요없는 관계가 좋은거다.

내가 뭘 이런걸이렇게 말하니까

워낙 많이 담궈서 남아서 가지고 온거라며 어색해 하며 주고 나가신다.

한병에 짱아찌 가득. 비닐봉다리로 정성껏 싸 오셨다.

딱 한병. 정겹다.

 

수술 전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20대 후반 젊은 아가씨.

부작용없이 잘 받고 있다. 사실 부작용은 있지만 환자가 그 증상들을 잘 무시하며 지내고 있다.

심지어 지난주에는 항암치료 중 백혈구 수치가 제일 떨어지는 기간에 동남아시아 여행도 다녀왔다. 딱 제일 수치가 낮은 때 여행을 가게 되었다. 여행 전날 외래에 와서 백혈구 검사를 시켰다. 너무 낮으면 촉진제라도 맞출려고 했다. 여행가서 열나면 먹으라고 항생제도 미리 처방해주었다. 미리부터 계획해 놓은 거라고 꼭 갈 거라고 한다. 정말 신경쓰였다. 이제 곧 수술할 날짜가 다가오는데 감기걸리면 어떻게 하나 나는 노심초사 걱정인데 정작 환자는 해피하게 여행계획과 준비로 바쁘다. 엄마도 안절부절이다. 꼭 가야 하냐고. 수술하고 나서 가면 안되냐고. 환자는 친구들이랑 이미 오래전부터 해놓은 여행계획이라고 꼭 간다고 한다. 심지어 가서 수중 스쿠버다이빙을 한다고 했다. 오마이갓, 백혈구 몇십개 밖에 없는 기간에 스쿠버 다이빙을 하겠다니 미칠 노릇이다. 아무튼 외래에서 몇번 실갱이를 벌이고 컨디션을 조절한 후 여행을 떠났다. 오늘 마지막 항암치료를 받으러 온 그녀. 내가 동남아 여행 선물의 으뜸, 부탁했던 말린 망고를 엄청 많이 사가지고 왔다. 열대 음료 2병과 함께. 원래 환자들이 선물을 주면 외래 간호사 선생님들과 나눠 먹는데 이번 망고는 몽땅 내 차지다.

 

허셉틴 유지치료를 받으시는 환자.

치료 끝무렵이 다가오니 지치셨는지 우울해 하신다.

지난번 외래에서

한 여름 되기 전 날씨 좋을 때 제주도 여행 한번 다녀오시라고 처방을 했다.

여행 다녀오니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고 하신다. 좀 힘들기는 했지만 잘 갔다온 것 같다고 하신다.

갔다 오시는 길에 제주도 초콜렛을 사다주셨다.

진료실에 비싼 초콜렛이 등장했다. 아주 스페셜 초콜렛이다.

 

탁소텔을 맞고 나서 우울감이 오는 환자. 함께 온 남편에게 환자한테 좀 잘해주라고 했더니 뭐라뭐라 말씀하시는데 꼭 화를 내는 것 같다.

 

, 왜 화를 내고 그래요?

부인, 원래 목소리 톤이 그래요.

남편, 뭐 맨날 그래요.

(이 분위기는 사실 험악한 분위기가 아니라 화기애애하다. 이런 말도 서로 눈치 안보고 하는 관계다)

 

남편은 무뚝뚝하고, 관심없는 척 하고, 아는 척 안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돌쇠 남편 스타일이다. 나는 부인이 치료 기간 중에 좀 히스테리를 부려도 이해해 주시라고 부탁한다. 탁소텔 맞으면 원래 그런거라고. 그러니까 잘 해주라고 했더니, 지금보다 뭘 더 어떻게 잘하냐고 뚱하게 한마디 하신다.

그러면서도 빵이 가득 담긴 큰 보따리를 내 앞에 밀어놓으신다.

빵 좋아하신다매요? 우리 와이프 잘 좀 봐줘요.

너무 사랑스러운 뇌물이다.

 

환자들의 정성어린 뇌물을 받고 보니

내가 과연 이런 정성을 받아도 되는 사람인가 싶다.

하루하루가 청천벽력처럼 무너지는 것 같고

때때로 밀려드는 불안감과 걱정 때문에

마음에 짙은 그늘이 수차례 지나갈텐데

그 와중에 나에게 이런 뇌물을 준비해 주시다니 눈물겹다. 고마워 죽겠다.

뇌물받은만큼 잘 할께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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