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약 바꿔줘서 고마워요

슬기엄마 2012. 5. 30. 16:59

먹는 약으로 바꿔줘서 고마워요

 

유방암이 재발한 할머니

할머니 나이는 70.

이제 우리 사회에서 70세는 애매한 나이이다.

노인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항암치료를 하기도 그렇고 안하기도 그렇다.

삼중음성유방암이라 항호르몬제도 못 쓰고 표적치료도 못 쓴다.

할머니 치료를 위한 선택은 항암제 뿐이다.

할머니 컨디션이 그리 나쁘지 않다.

아주 심한 것은 아니지만 폐정맥에 혈전도 생겼다.

4기 암환자에서 혈전증이 생기는 것은 병의 활성도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이제 막 재발하면서 병의 활성도가 막 올라가고 있나보다.

가족들과 상의하여

항암치료 용량을 표준보다 낮춰서 치료에 도전해 보기로 하였다.

할머니 본인은 상황을 자세히 모르지만

지금 항암치료를 하는게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하신 것 같다.

최근 여기 저기 이유를 알 수 없게 불편한 곳이 생겼다. 무슨 약을 먹어도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병이 나빠지면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할머니도 항암치료를 받고 싶어 하셨다.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 CT검사도 다시 하고

노인에서 CT 찍는 것도 부담이다.

CT 찍기 전후로 수액도 많이 맞고 부작용 방지제도 비급여로 맞는다

CT 찍고 나서 신장수치 검사도 다시 해본다.

 

숨이 아주 많이 찬건 아니지만 혈전증이 관찰되었으니 혈전치료제를 써야 한다.

 주사약 혹은 먹는약으로.

헤파린은 24시간 동안 계속 주사라 현실성이 없다. 퇴원할 수 없으니.

먹는약은 편리하지만 효과가 떨어진다.

매번 피검사를 해서 혈중농도를 체크해야 한다.

암환자에게 가장 효과가 좋은 항응고제는

하루에 한번 혹은 두번 맞는 저분자량 헤파린인데

이건 인슐린처럼 자가주사로 맞는다.

자기 스스로 혹은 가족이 주사를 맞춰줘야 한다.

그걸 교육하는 것도 아주 큰 일이다.

 

2년만에 다시 쓰는 항암제.

할머니는 자녀들과 함께 살지 않으신다.

자녀들에게 당부하는 것 말고도 할머니 스스로에게도 교육을 많이 해야 한다.

귀도 어둡고 눈도 밝지 않은 할머니에게 어디까지 교육하는게 좋을까? 결국 명함을 드린다. 할머니, 뭔 일 생기면 전화하세요. 70세가 넘는 분들께는 교육보다는 그냥 명함을 드리는게 속이 편하다.

 

한번 항암치료를 하고 할머니는 기운이 없어 3주만에 항암치료를 다시 할 컨디션이 안되었다. '기운없음'이 가장 심각한 부작용이다.

그래서 1주를 연기하여 오늘 오셨다.

 

몸 진찰을 하는데

배가 엉망이다.

한달동안 혈전증 때문에 맞은 주사로 온 배가 시뻘겋다.

매일밤 딸이 할머니 집을 방문해서 주사를 맞춰 주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가 항암제 후유증보다 혈전증 주사 맞는게 훨씬 힘들다고 하신다.

그래서 난 그냥 먹는 항응고제로 바꾸기로 했다.

먹는 약으로 혈중 농도 맞추려면 어려운데

그래도 할머니 형편 상 여러모로 주사는 어려워 보인다.

 

할머니, 먹는 약으로 바꾸어 드릴께요.

그래? 고마워.

나 항암 포기할려고 했는데, 그냥 오늘 항암제 맞고 갈께.

혈전증 주사만 안 맞으면 살거 같아.

 

먹는 약이 더 싸고도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드렸지만

할머니는 먹는 약 있으면 먹는 약을 먹겠다고 하시며

오늘 기꺼이 2차 항암치료를 받겠다고 하신다.

할머니가 진찰실을 나가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나에게 빠이빠이까지 하고 나가시는 모습이 너무나 활기차다. 그렇게 힘들었나...

혈전증 정도가 심하지 않았으니 먹는 약으로도 괜찮겠지 나도 그쪽에 마음을 기울인다.

 

교과서에 나와있는 최선/최고의 치료가

항상 환자에게 최선/최고는 아닌 것 같다.

현명한 의사는 환자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맥락에서 적절한 치료법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