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시키지 않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시계보며 외래를 보고 있는데
간호사가 슬쩍 내 책상으로 쪽지를 밀어 놓는다. 정자체로 또박또박 쓴 보호자 편지다.
선생님, 저는 *** 환자의 아들 *** 입니다.
금일 CT 결과를 말씀해주실 때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직접 너무 나쁘게 얘기하지 마시고
나중에 어머니 안계실 때 저에게 따로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어머니께서 쉽게 포기할 가능성이 있으셔서요.
번거로우시겠지만 부탁드립니다.
이런 편지를 받으면 두가지 생각이 든다.
한가지.
자식이나 보호자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므로,
가능하면 이들의 입장을 반영해서 진료하도록 하자.
다른 한가지.
치료받고 살고 죽는건 다 환자 목숨인데
누구보다도 환자가 가장 정확한 지식을 알고 자기 치료를 결정해야 하지 않나?
정답은 없다. Case by Case겠지.
오늘 온 환자는 여기 저기 전이가 많이 되었지만 크게 증상이 없고 연세가 많으셔서 호르몬치료를 유지하고 계시는데, 지난 달 찍은 폐 CT에서 뭔가 새로운 병변이 보였다. 폐로 진행된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서 1달 후에 다시 CT를 찍어 확인하기로 하고, 오늘 오신 것이다.
다행히 의심되었던 병변이 좋아졌다. 염증성 병변이었나 보다. 아들은 어머니 뒤에 서서 눈짓으로 나에게 뭔가 메시지를 계속 전한다. 나도 알고 있다는 눈치로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문제가 없으면 상관없다.
그런데 나쁜 소식을 전할 때는 문제가 된다.
나는 가능하면 환자에게도 솔직하게, 보호자에게도 솔직하게 얘기한다. 다만 환자에게는 나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지 않고 요점만 전하고, 그 이후의 메시지는 환자의 몫으로 남긴다. 난 환자랑 이야기나누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편이라고 자부한다.
충분히 여유있는 시공간을 확보한 다음 의사로서 나의 솔직한 견해를 밝히고 계획을 말했을 때 대부분의 환자나 가족들은 동의한다. 큰 문제 없다.
문제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적절하지 않을 때,
자꾸 대화가 꼬이고, 서로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나쁜 소식을 전하기에 정말 좋지 않다.
다 좋다가도
마지막이 나쁘면 나쁘게 된다.
그래서 아침 회진을 돌 때도 병실에서 다른 환자가 다 있는 상태에서
환자의 private 한 정보를 공개적으로 논하는 게 싫어서 따로 면담을 하는 편이다.
좋은 소식은 상관이 없는데, 나쁜 소식이 문제다.
나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시간 공간 그리고 의사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가끔은 나에게 너무 소모적인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한다.
사람을 대하는 직업
그중에서도 아픈 사람을 대하는 직업
아픈 사람 중에서도 암환자를 대하는 직업
암환자 중에서도 전이성 암환자를 대하는 직업
그것이 종양내과 의사인 나의 정신적 육체적 피로도를 설명하는 것 같다.
환자에게 잘 하려면
나도 피로하지 않아야 할텐데...
박카스 사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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