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나온 학생에게 편지를 받았다.
이번주 월요일 실습 첫날,
실습 돌면서 만나는 입원환자들, 외래 참관하면서 보게 되는 환자들, 그리고 종양내과 의사로서 느끼는 나의 소소한 감정들을 기록한 블로그를 보고
한주간 종양내과 실습을 돌며 느낀 점을 써달라고 했다.
오전 외래가 끝나고 편지를 주자 마자 도망가버렸다. 뒷감당이 안될 것 같다며...
과연 우리 학생은 무엇을 제일 크게 느꼈을까?
학생은 자기 삼촌 얘기로 글을 시작했다.
정기 건강검진을 받는 몇년간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들었는데
어느날 문득 폐암 4기를 진단받으셨다. 목소리가 나오지않고 숨이 차서...
건강검진에서 큰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은지 몇달 안되었는데 수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진행된 폐암.
증상이 갑자기 악화되어 별 치료도 받지 못하신 모양이다.
그 와중에 삼촌은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셨다고 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나빠질 수 있냐고, 사진이라도 비교해서 보여달라는 삼촌의 요청에
병원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정말 그랬을까? 사진 보여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소송을 계속 진행할 수도 없을 정도로 증상이 나빠지면서 결국 삼촌은 소송을 포기하고 임종을 맞이하셨나보다.
학생이 삼촌을 찾았을 때, 삼촌은 의사의 한마디, 제가 진단을 잘못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병이지만 그래도 조금 더 일찍 발견했으면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억울한 마음도 있었지만, 환자가 진짜 원했던 것은 의사의 사과였나보다.
전공의 1,2년차 시절,
다른 병원에서 온 환자, 다른 과 환자를 볼 때,
이해가 안되는 검사와 진료 패턴을 보며 분노를 느끼면 나는 참지 않고 문의전화를 하였다.
직접 전화해서,
왜 그런 과정/검사를 하게 되었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내가 보기엔 이러이런 검사가 진행되는게 필요했을텐데 왜 그 검사를 안했는지, 검사 소견상 이상소견이 보였는데 추가적인 검사를 진행하지 않은 이유는 뭔지, 지금 보이는 이상소견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있었는지,
전화로 꼬치꼬치 캐묻고 내 성에 안차면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아주 쌈닭이었다.
그렇게 치고 받고 싸우면서 나도 험한 말 많이 했고, 나도 상처를 많이 받았다.
이제 와서 얘기해도 소용없는 경우도 많고
환자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핵심적인 것은
첫째
의료진 간에도,
환자와 의사 사이에도
상황을 둘러싸고 공유하는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둘째
내부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얽혀 환자에게 사실을 정확히 설명하는게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단순하게 의사가 오진하여 뭔가가 잘못되었는데 그걸 은폐하려고 했다는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경우도 많았다.
학생은 이 두가지 문제를 다 제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해
적당히 타협하고 무마하고
내가 차리리 뒤집어 쓰는게 속편하다는 그런 회피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변해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진실(이런 단어가 적절한 선택이 아닐것 같지만)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복잡하고 성가시고 너무 많은 에너지가 투여되는 것에 비해, 그 결과는 환자에게도 의사에게도 별 도움이 안될 것 같은 상황을 여러번 경험하고 나서 나는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있는 것 같다.
처음부터 내가 환자를 진료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나는 환자에게 그 과정을 솔직하게 다 설명(변명?)한다.
내가 어느 대목에서 어떤 근거로 결정을 내렸지만 결론적으로 환자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초래된 것 같다. 유감이고 미안하다.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다.
(물론 이런 상황 자체를 초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니까 발생건수가 줄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긴다)
환자에게 말해야 하는 상황보다
더 심각하게
스스로 고민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환자는 나에게 불만없지만
나 스스로에게 불만을 느끼는 경우가 훨씬 많다.
정말 이렇게 하는 게 맞는걸까? 최선의 선택일까? 근거는 확실한가?
그래서 나는 환자들에게 항상 최선을 다해 진료하고 결정하려고 노력한다. 일종의 보상심리다.
다른 의사의 행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토론하고 문제를 제기해야할까?
나는 동료의사를 굳이 감싸고 싶지는 않다.
실수였든 실력이었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의사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회피형 인간으로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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