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정말 고마워요

슬기엄마 2011. 8. 30. 23:02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지금이 네 인생 최고의 시기 아니냐고.
그 말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본다.

나에게 가장 의미있는 일은 뭘까.
지금은 나에게 정말 최고의 시기일까.
지금을 사는 나에게 행복이란 뭘까.
매일 밤 늦게까지 병원에서 환자차트를 보며 가슴을 쥐어 뜯으며 일하는 나에게
이 하루하루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집에는 가서 잠만 자고 오고
병원-집-병원-집
집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나,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나빠지는 환자가 많은 외래.
상태가 나빠서 입원한 병동 입원 환자들, 검사 결과도 좋지 않고
상태도 계속 나빠지는 환자 우후죽순.
오늘은 아주 슬프다.

책상에는 읽지도 못하고 먼지 쌓인 채 누렇게 바래가는 논문들.
미처 처리하지 못한 메일로 꽉찬 전자메일함. 보관 기한이 지나 지워져가는 메일들.
난국을 돌파할 아이디어도 없고.
이런 답답한 현실도
환자를 생각하면서 다 날려버릴 수 있었는데...

오늘의 내 모습을 보고 환자들도 나를 안쓰러워한다. 그렇게 안 좋아보였나?

나는 의사로 일하게 된 것에 하늘에 감사한다.
나는 환자를 보는 의사인 것이 최고 좋다.
몸과 마음이 고달픈 이들에게
내가 가진 한줌 지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이 최고 좋다.
인턴시절,
뇌수술 후 변비로 고생하던 환자, 약을 아무리 먹어도 장운동이 회복되지 않아 변비약 효과가 없었는데 내가 가서 손가락으로 똥을 파주니 장의 연동운동이 돌아와서 변비가 해결되었다. 환자가 너무 고맙다며 퇴원할 때 나를 찾아 내 손에 꼭 쥐어준 십만원짜리 수표한장. 
그동안 나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환자였다.
그렇지만 마음의 성의를 다한다고 환자가 다 좋아지는 건 아니다.

환자 보는거 말고 해야하는 일이 많은거, 그것도 잘 해내는 의사가 되어야 할텐데...
진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멍해진 머리로 할일들을 바라만 보고 있다.

고마워요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저 멋적어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 내 맘을 알아줘.

사랑해요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그저 수줍어 당신에게 하지 못한 말, 내 맘을 알아줘.

우리 함께 지내온 시간들, 그동안 행복한 기억들
정말로 고마워요.

항상 내 맘 깊은 곳에서 당신은 언제나 날 위로해줬어요
정말로 고마워, 함께 있어서.

행복이란 뭘까
가끔은 현실에 가리워 잘 느끼지 못했죠 멀게만 느꼈죠
그때마다 위로가 되어 준, 행복의 의미를 다시 찾아준
내겐 너무나 커다란 선물, 정말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함께 해 줘서.

환자가 나를 믿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나에게 의지하며
치료하는 과정을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정말 고마운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렇지만
가족
환자
병원일
연구
공부
안정적인 삶
사랑과 우정
정의와 도덕
수많은 삶의 가치들,
죽을 때까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실천하고 살기 어렵겠지?
나는 그 가운데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

확실한 것은
가운을 입고 병원에 있는 한
나는 의사라는 것이다. 환자와 함께 있을 때 의미가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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