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말할 수 없는 것의 진실

슬기엄마 2011. 5. 15. 12:27

예전에는
다른 의사, 다른 과, 다른 병원의 잘못, 비합리성, 문제점에 대해 거침없이 얘기했었다.
학생 때는 당당했고
인턴 때도 비판적이었다.
청년의사에 글도 싣고
내 생각을 주장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레지던트 시절 부터는 누가 나에게도 돌을 던질까봐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펠로우 시절에는 객관적인 시각이라는 미명 하에 남을 돌아보기보다 나를 먼저 돌아보게 되었다. (겸손의 의미가 아니라...)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제 다른의사/다른과/다른 병원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나에 대해 말하는 것/다른 나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여전히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주 미시적인 것, 아주 거시적인 것을 논하는 것에는 별로 책임감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환자를 보다가, 병원 생활을 하다가
첨예한 문제를 인식했을 때 이를 문제제기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1. 말해봤자 소용없다 - 문제의 본질을 진정성을 인식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 또한 말로 문제제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문제제기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현실/제도의 변화를 촉구하는 실천을 필요로 한다. 내 실천의 결의가 확고하지 않으면 나도 말만하는 사람이 되기가 쉽다.
2. 말하고서 본전을 못 찾는다 - 사태가 해결되기는 커녕 악화될 수도 있다. 나의 문제제기 대상이 되는 사람/그룹으로부터 나의 약점이 파헤쳐지면서 내가 공격의 대상이 되거나, 내 문제제기의 취지와 상관없이 정치적인 논란거리로 확장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나만 욕먹게도 된다.
3. 말했다가 의사라는 직업의 신뢰도만 떨어뜨린다. 공개적인 문제제기가 의사의 직업적인 명예를 훼손시키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안주감이 될 뿐이다.

다른 과/의사의 malpractice에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다.
그건 내가 더 잘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 환자의 뒷감당을 하면서 하느님께 기도한다. 주여 저희를 용서해 주소서....
어떻게 문제제기를 해야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예전에 비해
용기도 많이 없어지고
의지도 많이 꺾이었다.
그래도 말 할 것은 말하며 살아야 겠다고 결심한다.
주여 저희를 용서해 주소서.
저희에게 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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