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인턴일기 22

의사로 사회화되기

의사로 사회화되기 의료사회학의 학풍은 영국과 미국으로 대별된다. 의료시스템의 차이만큼 의료사회학의 학풍도 다른 것이다. 의사의 사회화(socialization) 혹은 전문화(professionalization)에 대한 연구는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현재 미국 사회학회 회원은 1만 5천명에 육박하며 이 가운데 의료사회학 전공자로 지칭되는 사람들이 2천명에 달해 미국 사회학회 내 2번째로 큰 분과에 해당한다. 1960년대 중반 미국 의료사회학이 막 발전하기 시작하던 당시의 핫 이슈는 ‘왜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비슷한 캐릭터로 변화하는가?’였다. 의대 입학 당시에는 다양한 학부를 졸업하고 그만큼 사회적 배경에 차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을 때의 태도, 가치관, 행동양..

‘나이’와 ‘여자’라는 변수

‘나이’와 ‘여자’라는 변수 의대에 편입했을 당시, 내 소개를 하면 반드시 돌아오는 질문. “몇 년생이세요?” 내 동기들이 78∼79년생인 반면 나는 72년생이니, 의과대학 전체 학생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많은 편이었다. 병원에 들어온 지금에도 웬만한 레지던트들보다 나이가 많고, 심지어 최근에 임용된 주니어 스탭과도 나이가 엇비슷하다. 의대 오기 전 대학원에서는 항상 막내였던지라, 세미나를 위한 복사, 모임 연락하기, 모임 후 뒷정리 등 각종 잡무를 도맡았었고, 어떤 실수를 하거나 무식한 말을 해도 용인되었었기에, ‘왕언니’라는 의대에서의 상대적 지위 변동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1995년 무렵 석사과정에서 문화(culture)와 세대(generation) 문제를 공부할 당시 나의 ‘연구 대상’이었던 당시..

응급실의 잠 못 이루는 밤

응급실의 잠 못 이루는 밤 몇 년 전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협심증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는 55세 남자. Regular follow up이나 medication없고, 술 담배가 왜 위험한지 별다른 설명을 들어본 적 없다. 30분 이상 가슴이 답답하고 이따금 숨쉬는 것까지도 힘들 정도로 chest pain이 develop되었는데도 이틀 이상 병원에 오지 않은 채, 속이 안 좋은 것 같다며 약국에서 무슨 약인지를 사먹다가 새벽에 chest pain이 심해져 응급실 내원. Hypertension, TIA Hx가 있는 할머니.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오른쪽 상지와 하지에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같이 사는 자식들에게 말도 안 하고 며칠을 지내다 갑자기 dysarthria가 생기고 mental s..

엽기적인 여자 인턴방

엽기적인 여자 인턴방 우리 병원 36명의 여자 인턴은 방 2개에 모여 같이 ‘산다’. 새벽이 되면 울려대는 call과 각자 맞춰 놓은 알람소리 때문에 비슷한 시간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같은 식빵에 같은 쨈을 발라먹고 같은 우유를 마신다. 음료수랑 야식용 라면도 같은 걸 먹는다. 잘 때도 모두들 초록색 수술복을 입고 잔다. 공동세면장의 비누도 같은 걸 쓴다. 큰 방에 한 대 있는 TV도 모두 둘러앉아 같이 본다. 누군가 큰 아이스크림을 사오거나 군것질 거리가 생기면 모두 함께 먹는다. 정말 정겨울 것 같지 않은가? 간혹 나는 ‘우리가 싸는 똥의 성분도 똑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새벽 1∼2시까지 일해야 하는 파트, 새벽 4시면 일어나야 하는 파트 등 일하는 시간이 다르다보니 인턴방은 거의 24시간 ..

버림받았지만 행복한 아이 (2)

버림받았지만 행복한 아이 (2) 성주의 진단명이 바뀌어 있었다. Graft versus host disease. 사실 hematuria가 있을 때부터, 그래서 동기 소아과 인턴이 q2h로 bladder irrigation을 한다고 투덜거릴 때부터 마음이 불안해서 성주에게 찾아갈 수가 없었다. 병동에 가서도 차트만 보았는데, 요 며칠동안 mild fever, abdominal pain, skin rash도 재발하고 있었다. 오늘은 무거운 마음으로 성주를 찾아가 본다. 최근 1년 동안 성주를 돌보아 주고 계신 할머니는 성주가 있는 보호소 소장의 친구분이시다. 당신 집에서 성주를 돌보시고 이식 기간 동안 무균실에서도 내내 성주 곁에 계신 분이다. 바로 옆 병동에 입원한 당신의 친구에게 한번 가볼 틈도 없이 성..

버림받았지만 행복한 아이 (1)

버림받았지만 행복한 아이 (1) 잠시 call이 안 오는 틈을 타 소아병동 끝에 자리잡은 성주의 방에 들렀다. 그 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문에 매달려 있는 소독약으로 손을 닦아야 한다. 누워서 소변통을 붙잡고 시뻘건 피오줌을 누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성주. 며칠 전부터 hematuria가 생긴 모양이다. 오늘은 성주가 stem cell transplantation을 받은 지 33일째다. 내가 성주를 처음 만난 건 본과 3학년 소아과 실습 때였다. 내가 담당한 환자의 옆자리에 성주가 있었다. 성주는 백혈병으로 항암치료 중이라 머리를 빡빡 밀었었는데, 어찌나 귀여웠는지 내 눈에 쏙 들어왔다. 내가 담당한 환자를 만나러 갈 때마다 은근히 성주를 찾아보곤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항상 옆에는 엄마가 아닌 ..

F/U 날짜 없는 퇴원 요약지

F/U 날짜 없는 퇴원 요약지 인턴 생활 4달만에 외부 병원으로 파견을 나왔다. 낡은 병동의 답답한 공기, 게다가 일찍 찾아온 여름의 텁텁함에 질릴 무렵이라 파견이 반갑다. 본원을 벗어난다는 해방감에다가 업무의 과중함도 비교적 덜하기에 마음은 가볍지만, 생소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고 일이 손에 익을 때까지는 불편함도 많다. 나는 낯선 병원의 신생아집중치료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병실에는 육중한 침대 대신 고물고물한 아기들이 담겨있는 바구니가 가득하다. 폐렴이 의심되는 아기들, 설사하는 아기들, 황달치료 중인 아기들이 구역별로 놓여 있다. 내 아이가 지금 초등학교 1학년이니, 대략 7년 전에 나는 이런 갓난아이를 데리고 씨름하며 여름을 보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그 아이들이 '환아'라기보다는 ..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환자들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환자들 소화기 내과에서 내가 담당했던 30여 명의 환자 가운데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환자들이 몇몇 있었다. 다른 환자들이 다 stable해도 한두 명의 중환이 있으면 밤잠 편안히 자기는 틀렸다. 한밤중, 환자의 혈압이 떨어지고 있다는 call이 오고, 발바닥에 불이 나게 병동으로 뛰어간다. 가자마자 손목을 붙들고 pulse를 확인한다. 분당 150회. 혈압은 잴 수가 없다. 청진을 하니 심음은 희미하게 들리는데, light reflex가 없다. 다시 손목의 pulse를 확인하니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vital sign을 check하는 짧은 순간에, 환자는 expire한 것이다. 내가 있는 병원의 입원환자 중 암환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높다. 암 진단 이후 4∼5년,..

마치 여러 번 해 본 사람처럼

마치 여러 번 해 본 사람처럼 미셸 푸코가 지적했듯이 근대는 주체의 탄생으로 문을 연 시대이고 병원은 근대 임상의학의 탄생과 함께 주체의 몸에 대한 권력이 행사되는 공간이다. 푸코의 철학적 테제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병원인 것 같다. 땀으로 범벅된 초턴의 얼굴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팔을 내밀고 항암주사를 맞아야 하는 환자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미안하고 당황스럽다. 지난번 인턴 선생님이 주사를 잘못 놓아 일주일 내내 팔이 아프고 저렸다는 말로 은근히 나에게 압력을 넣는 환자가 얄밉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간경변으로 복수가 너무 많이 찬 환자에게 paracentesis를 시행한다. 나는 마치 여러 번 복수천자를 해본 사람처럼 능숙하게 ..

제발 vein을 보여 주시옵소서

외래 주사실에서 IV job을 처음 해보는 나. 병원마다 IV job을 인턴 혹은 간호사가 하는 것 때문에 다소의 논란이 있지만 내가 일하는 병원에서는 외래 주사실 근무에 인턴이 투입된다. 나는 학생 실습 때부터 채혈용 vacuum tube, angiocath, scalp needle을 막론하고 IV를 성공해 본 적이 없어, needle phobia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Tourniquet을 묶고 튀어 오르는 vein을 찾는 그 행위부터 당황스럽다. 틈나는 대로 atlas를 보며 피부 밑 정맥의 주행을 눈에 익혀두지만 주사실 근무를 시작하던 날, 정작 환자 앞에 서기만 하면 서투른 손놀림,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 한눈에 보아도 ‘어설픈 인턴’의 모습 그 자체이다. 외래 주사실에 오는 환자들은 항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