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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인 여자 인턴방

엽기적인 여자 인턴방 우리 병원 36명의 여자 인턴은 방 2개에 모여 같이 ‘산다’. 새벽이 되면 울려대는 call과 각자 맞춰 놓은 알람소리 때문에 비슷한 시간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같은 식빵에 같은 쨈을 발라먹고 같은 우유를 마신다. 음료수랑 야식용 라면도 같은 걸 먹는다. 잘 때도 모두들 초록색 수술복을 입고 잔다. 공동세면장의 비누도 같은 걸 쓴다. 큰 방에 한 대 있는 TV도 모두 둘러앉아 같이 본다. 누군가 큰 아이스크림을 사오거나 군것질 거리가 생기면 모두 함께 먹는다. 정말 정겨울 것 같지 않은가? 간혹 나는 ‘우리가 싸는 똥의 성분도 똑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새벽 1∼2시까지 일해야 하는 파트, 새벽 4시면 일어나야 하는 파트 등 일하는 시간이 다르다보니 인턴방은 거의 24시간 ..

버림받았지만 행복한 아이 (2)

버림받았지만 행복한 아이 (2) 성주의 진단명이 바뀌어 있었다. Graft versus host disease. 사실 hematuria가 있을 때부터, 그래서 동기 소아과 인턴이 q2h로 bladder irrigation을 한다고 투덜거릴 때부터 마음이 불안해서 성주에게 찾아갈 수가 없었다. 병동에 가서도 차트만 보았는데, 요 며칠동안 mild fever, abdominal pain, skin rash도 재발하고 있었다. 오늘은 무거운 마음으로 성주를 찾아가 본다. 최근 1년 동안 성주를 돌보아 주고 계신 할머니는 성주가 있는 보호소 소장의 친구분이시다. 당신 집에서 성주를 돌보시고 이식 기간 동안 무균실에서도 내내 성주 곁에 계신 분이다. 바로 옆 병동에 입원한 당신의 친구에게 한번 가볼 틈도 없이 성..

버림받았지만 행복한 아이 (1)

버림받았지만 행복한 아이 (1) 잠시 call이 안 오는 틈을 타 소아병동 끝에 자리잡은 성주의 방에 들렀다. 그 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문에 매달려 있는 소독약으로 손을 닦아야 한다. 누워서 소변통을 붙잡고 시뻘건 피오줌을 누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성주. 며칠 전부터 hematuria가 생긴 모양이다. 오늘은 성주가 stem cell transplantation을 받은 지 33일째다. 내가 성주를 처음 만난 건 본과 3학년 소아과 실습 때였다. 내가 담당한 환자의 옆자리에 성주가 있었다. 성주는 백혈병으로 항암치료 중이라 머리를 빡빡 밀었었는데, 어찌나 귀여웠는지 내 눈에 쏙 들어왔다. 내가 담당한 환자를 만나러 갈 때마다 은근히 성주를 찾아보곤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항상 옆에는 엄마가 아닌 ..

F/U 날짜 없는 퇴원 요약지

F/U 날짜 없는 퇴원 요약지 인턴 생활 4달만에 외부 병원으로 파견을 나왔다. 낡은 병동의 답답한 공기, 게다가 일찍 찾아온 여름의 텁텁함에 질릴 무렵이라 파견이 반갑다. 본원을 벗어난다는 해방감에다가 업무의 과중함도 비교적 덜하기에 마음은 가볍지만, 생소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고 일이 손에 익을 때까지는 불편함도 많다. 나는 낯선 병원의 신생아집중치료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병실에는 육중한 침대 대신 고물고물한 아기들이 담겨있는 바구니가 가득하다. 폐렴이 의심되는 아기들, 설사하는 아기들, 황달치료 중인 아기들이 구역별로 놓여 있다. 내 아이가 지금 초등학교 1학년이니, 대략 7년 전에 나는 이런 갓난아이를 데리고 씨름하며 여름을 보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그 아이들이 '환아'라기보다는 ..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환자들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환자들 소화기 내과에서 내가 담당했던 30여 명의 환자 가운데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환자들이 몇몇 있었다. 다른 환자들이 다 stable해도 한두 명의 중환이 있으면 밤잠 편안히 자기는 틀렸다. 한밤중, 환자의 혈압이 떨어지고 있다는 call이 오고, 발바닥에 불이 나게 병동으로 뛰어간다. 가자마자 손목을 붙들고 pulse를 확인한다. 분당 150회. 혈압은 잴 수가 없다. 청진을 하니 심음은 희미하게 들리는데, light reflex가 없다. 다시 손목의 pulse를 확인하니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vital sign을 check하는 짧은 순간에, 환자는 expire한 것이다. 내가 있는 병원의 입원환자 중 암환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높다. 암 진단 이후 4∼5년,..

마치 여러 번 해 본 사람처럼

마치 여러 번 해 본 사람처럼 미셸 푸코가 지적했듯이 근대는 주체의 탄생으로 문을 연 시대이고 병원은 근대 임상의학의 탄생과 함께 주체의 몸에 대한 권력이 행사되는 공간이다. 푸코의 철학적 테제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병원인 것 같다. 땀으로 범벅된 초턴의 얼굴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팔을 내밀고 항암주사를 맞아야 하는 환자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미안하고 당황스럽다. 지난번 인턴 선생님이 주사를 잘못 놓아 일주일 내내 팔이 아프고 저렸다는 말로 은근히 나에게 압력을 넣는 환자가 얄밉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간경변으로 복수가 너무 많이 찬 환자에게 paracentesis를 시행한다. 나는 마치 여러 번 복수천자를 해본 사람처럼 능숙하게 ..

제발 vein을 보여 주시옵소서

외래 주사실에서 IV job을 처음 해보는 나. 병원마다 IV job을 인턴 혹은 간호사가 하는 것 때문에 다소의 논란이 있지만 내가 일하는 병원에서는 외래 주사실 근무에 인턴이 투입된다. 나는 학생 실습 때부터 채혈용 vacuum tube, angiocath, scalp needle을 막론하고 IV를 성공해 본 적이 없어, needle phobia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Tourniquet을 묶고 튀어 오르는 vein을 찾는 그 행위부터 당황스럽다. 틈나는 대로 atlas를 보며 피부 밑 정맥의 주행을 눈에 익혀두지만 주사실 근무를 시작하던 날, 정작 환자 앞에 서기만 하면 서투른 손놀림,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 한눈에 보아도 ‘어설픈 인턴’의 모습 그 자체이다. 외래 주사실에 오는 환자들은 항암..

허약한 시스템과 과잉 적응된 개인

허약한 시스템과 과잉 적응된 개인 소위 ‘의사’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이 직업적 윤리에 적합하다(매우 식상한 발언이다). 그러나 한 달 남짓한 병원생활을 겪으며, 여러 과에서 인턴 업무의 중심축이 환자 care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기보다는 의사들 사이의 왜곡된 권위의식과 의국 내 질서의 유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예를 들면 환자에게 왜 수술이 필요한지, 수술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예후와 예상되는 합병증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더 나아가 환자의 직업과 가족 관계 등을 고려했을 때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는지 등의 내용이 논의되는 시간보다는, 과 내에서 입퇴원 장부를 작성하기 위해 인턴부터 레지던트 4년차까지 밤을..

나는 어떤 경우에 달리는가

나는 자꾸 irritable하게 움직이는 환자를 원망하며 한 손으로는 환자의 두 손과 배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환자의 턱을 붙잡고 있었다. 오늘따라 CT찍는 시간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지? 납옷을 입어서인지 몸이 축축 늘어지는 것 같아 힘들다. 누워있는 환자를 내 몸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 CT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리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끝나는 기색이 없어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컴컴하게 어둠에 쌓인 방. 분위기가 이상해서 나는 누워있는 환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내 몸무게에 짓눌린 채 괴로워하는 환자는 바로 내 남편. 아마 나는 가위에 눌려 꿈속에서도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나보다. 의사가 되어 처음 근무한 신경외과에서의 한 달간 인턴생활, 그 사이에 내 몸에 각인(embo..

레이트 어답터(Late adapter)의 비애

5년 전, 우리 병원에 전자차트(Electronic Medical Record)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나는 당시 오더도 제일 많이 내고 차트와 함께 몸부림치며 살아야 하는 레지던트 1년차였다. 시스템이 바뀌었다고 처방을 못 내거나 환자 진료에 차질이 생긴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새로 바뀐 EMR 시스템에 적응해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정보통신팀에 전화를 해야 했고, 오더를 내다가 막히면 젊고 똘똘한 동기들에게 물어봐서 내가 풀지 못한 당면과제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 젊고도 빠릿빠릿한 동기들은 같은 오더를 내더라도 클릭을 몇 번 하느냐가 나랑 달랐다(물론 그들의 클릭 수가 훨씬 적었다). 처음 가동되는 덩치가 큰 EMR은 클릭 한 번 하고 화면이 넘어가는 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