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늦은 시간 회진

슬기엄마 2013. 11. 29. 21:39


사실 입원환자 회진은 오전 일찍 끝내야 한다.
회진을 돌고 치료 방침을 결정해야  
전공의가 내 지시대로 처방도 내고
검사 결과도 확인하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푸쉬도 하고 - 회진 정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무수히 고민하고 제도개선을 요구했던 시절도 있었다. 많이 좋아진 부분도 있고, 여전히 구래를 답습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여하간 전공의는 회진 정리를 하고 오전에 바쁘게 뛰어다니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시스템에서라도. - 
여기 저기 병동에서 날라오는 병동 콜도 해결하고
예상치 못하게 상태가 나빠진 환자에게 달려가 봐야 하고
그 와중에 밥도 좀 먹고
당직서느라 못잔 잠을 의자에 앉은 채라도 선잠으로 보충을 해야 한다.
그렇게 전공의가 일을 하려면
내가 일찍 회진을 돌고 정리를 해줘야 한다.


한창 에너지가 넘칠 때는 잽싸게 회진을 돌고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회진을 빨리 돌아야 나도 내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 
 

요즘은 그렇게 못한다.
그렇게 애를 쓰려면 힘이 딸린다.
솔직히 그럴 의욕도 없어지는거 같다.
많이 무기력해졌다.


아침에 간단한 회의가 있었다.
예전 같으면 회의 전에 회진을 일부 돌고 회의에 갔다가 또 나머지 회진을 돌고
눈썹 휘날리게 달리며 오전 회진을 돈 다음
외래 진료를 시작한다.


그런데 오늘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몸이 너무 힘들었다. 
회의 시간을 맞춰서 가기에 빠듯했다.
회의에 가서 겨우 얼굴만 내밀고 비실비실, 외래로 가서 좀 쉬다가 
오전 외래 진료를 시작했다.
입원 환자 회진을 못 돌고 하루를 시작한다.


외래를 보고 있는데
전공의가 계속 문자를 보낸다.
회진을 같이 돌지 않아서 결정이 안된 사항에 대해 묻는다.
미안했다.


외래보고, 회의하고, 미팅하고, 임상연구 audit도 받고, 보호자 면담도 하고...
내 자리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여기 저기 계속 바쁘게 돌아다닌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도저히 가운만 입고 못 다니겠다.
가운 안에 두꺼운 털조끼를 껴입고 목도리도 두르고 병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오래된 병원이라 조각조각 건물이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바깥 바람을 자꾸 쏘이게 된다. 
날이 추우니 몸이 계속 긴장상태이다. 에너지 소모율이 높은 것 같다.
그렇게 저녁 7시가 넘으니 너무 피곤하고 의욕도 없고 힘들다.


꾸역꾸역 혼자 밥을 먹고 저녁 회진을 간다. 밥이라도 먹고 가야할 것 같다. 너무 의욕이 없으니 밥심으로라도 회진을 돌아야 한다. 그 시간에 전공의를 부를 수는 없다. 그냥 혼자 돌기로 했다.



가장 상태가 나쁜 환자한테 제일 먼저 간다.
상태가 좋지 않은 어머니를 만나러 미국에서 딸이 왔다. 나와는 메일, 전화로 몇번 통화만 하던 중 나는 이제 시간이 얼마 없는거 같다고, 하루라도 빨리 와서 엄마를 보라고 독촉했다. 원래는 미국에서 사는 딸에게 가서 치료를 받기로 했지만, 그럴만한 컨디션이 되지 못하고 결국 우리 병원 응급실로 다시 돌아왔다. 그 딸에게 그동안 찍은 엄마의 사진을 보여주고 상태를 설명한다.
딸은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그냥 고통없이 주무실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꺽꺽 거린다.
그녀는 아픈 엄마에게 멀리 떨어져 있어 미안한 마음 뿐이다.



죽을 각오를 하고 항암치료를 시작한 K.
나이도 어린데, 그동안 아주 꿋꿋하게 잘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병 상태는 아주 좋지 않다. 
2주 전, 나는  K에게 직접 말했다. 지금 못 먹고 아프고 힘들지만 지금 항암치료를 시도해 보지 않으면 좋아질 기회는 영영 없을 것 같다고, 치료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무너질 수는 없지 않겠냐고, 그런데 항암치료를 하면 지금보다 더 아프고 힘들고, 사실 죽을 수도 있다고, 그래도 해보겠냐고 직접적으로 K에게 물었다. 엄마는 차마 그 얘기를 직접 할 수 없으니 내가 직접 딸에게 얘기해 달라고 했다. 

K는 항암 치료를 하겠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엊그제 2번째 항암제를 맞았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이후로 통증도 심하고 잠도 잘 못자고 너무 힘들어 한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 봐도 통증 조절이 안된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 가보니 그렇게 퉁퉁 부어있던 양 다리와 배의 붓기가 많이 빠졌다. 항암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 같다. 나는 너무 기뻤다. 종아리가 말랑말랑 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K는 날 보자마자 울기 시작한다.
선생님 너무 보고 싶었다고, 왜 지금 왔냐고, 큰 소리로 엉엉 운다.
그동안 힘든 걸 참느라 너무 지쳤나 보다. 내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너무 미안했다.
같이 기도도 하고, 항암제 쓰고 좋아진거 같다고 격려도 해 주었다. 
통증 조절이 안되서 오늘은 수면제 맞고 자기로 했다. 
입원한지 50일이 넘었다. 그동안 그녀는 물 한모금을 못 넘기고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 한번도 울지 않았는데 오늘 눈물을 터뜨린다. 많이 힘든거 같다.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며 큰 소리로 엉엉 운다. 아침 저녁으로 꼭 회진을 가기로 약속했다. 디자이너가 꿈이었던 그녀에게 꼭 나아서 내 손톱에 네일 아트 해달라고 했다. 천주교 신자인 그녀를 위해 내 책상에 놓인 성모상을 가져다 줘야겠다. 

 
중환 몇명을 먼저 만나고 시름에 잠긴 보호자들에게 지금의 환자 상태를 설명한다. 
오늘 저녁 회진은 
이번에 퇴원 못하고 환자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그런 나쁜 말들을 주로 하는 날인거 같다.  




아침에 부지런히 회진을 못 돌고
저녁밥 먹고 뒤늦게 회진을 도는 오늘의 나.
사실 빵점이다.


그런데도 환자들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자기를 보러 와줬다는 사실에 연신 고맙다고 말한다.
왜 아침에 안 오고 이제 왔냐고 속으로 욕을 할지언정 겉으로는 고맙다고 한다. 
참으로 민망스러운 인사이다. 



그런데 
밤에 회진을 돌아보면 
분위기도 덜 어수선하고
환자나 보호자와 나누는 이야기도 더 진솔해 지는거 같다.  
이런 시간을 한번 갖고 나면 
의사와 환자 관계의 밀도도 높아지고 서로에게 깊은 믿음이 생기는 것 같다.


나는 컨디션이 왠만하면 입원장을 잘 안주는 편이라 
내 환자가 입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환자의 현재 상태가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더 많은 관심과 집중적인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회진을 아침 저녁으로 돌면
내가 소진된다.
가능하면 나의 에너지를 아끼고 오래 버틸 수 있도록 나를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다.
환자에게 나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면
나에게 요구되는 또 다른 병원 내에서의 역할을 다 수행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힘을 안배하고 에너지를 잘 분산시켜서 일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환자는
정성스러운 말 한마디를 할 줄 아는, 손 한번 잡고 위로해 줄 있는, 진심을 담은 눈길 한번을 더 주는,
그런 착한 의사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오랫만에 착한 의사 코스프레를 한번 해 봤다.
가끔은 이런 시간도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