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독백이 아닌 대화의 어려움

슬기엄마 2013. 11. 21. 17:30


친구끼리도

가족끼리도

멀리서 보면 다정하게 대화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그들의 이야기는 대화가 아니라 서로 자기 얘기만 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나대로 내 이야기를 쏟아 놓고

상대방은 상대방 대로 자기 이야기를 쏟아 놓고 있다.

사실 각자 독백을 하는 건데 같은 공간에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게 대화냐, 독백이냐?


그렇게 말하고 웃는다.

그렇게 웃을 관계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진심을 다한 대화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이성적 준거에 의한 의사소통을 잘 하는 일 조차 생각보다 쉽지 않다.

대화는 어쩌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병원에서 치료받은 적이 있는 환자들은 우리 병원에 올 때

그 병원에서 치료받은 의무기록과 검사결과들을 가지고 온다.

모든 기록을 다 떼어 와도

그 당시 의사는 내심 어떤 판단 기준에 의해 그런 치료적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

쉽게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기회가 닿으면 그 선생님에게 연락을 하여 당시 정황을 묻고 지금의 상황에 대한 해석을 들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아, 그저 짐작을 하게 된다. 아마도 이러이러한 근거하에 이러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 같다 그렇게 말이다.


또는 그 병원에서 제시하는 치료를 받지 않고 우리병원에 오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치료를 받지 않고 한참 있다가 오는 바람에 지금의 나로서는 적절한 대안을 내기 어려운 상황으로 오는 경우도 있다. 



유방암 수술 후 3기말로 진단을 받았다.

항암치료도 하고 방사선치료도 하고 호르몬치료도 받아야 했던 환자다.

그런데 아무것도 받지 않고 2년 가까이 지내다가 

갑자기 목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목이 잘 움직이지 않는 증상으로 우리병원에 왔다. 

환자는 목에 임시 기브스를 한 채 외래로 걸어왔지만

나는 한 눈에 이것은 응급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서둘러 당일 신경외과 외래를 접수하여 환자를 글로 보냈다. 

그리고 환자는 신경외과에서 당장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 

큰 일 날뻔 했다. 


수술 후 환자를 다시 만났다.

통증도 없고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움직일 수도 있게 되었다. 

급한대로 호르몬치료부터 시작했는데, 약 먹은지 2주도 안되었는데 호르몬치료에 의한 폐경증상으로 환자가 밤에 잠을 잘 못자고 훅 달아오르는 느낌때문에 불편해 하기 시작한다. 약에 매우 민감한 스타일이구나...


근데요

왜 그때 수술받고 나서 항암치료도 안 받고 아무것도 안 하셨나요?


선생님이 치료 과정에 대해 너무 무섭게 말씀하셔서요.


원래 의사들이 그래요.

긍정적인 면만 말할 수는 없잖아요.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합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좋은 얘기만 할 수는 없답니다.


그래도 저는 그 설명을 듣고는 도저히 치료를 받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치료 안하겠다고 하니까 그 선생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호르몬 치료라도 하라고 했어요.


근데 왜 안하셨어요?


그냥 다 무서워서요. 

호르몬 치료도 나름 부작용이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원래 모든 약에 민감한 편이고 부작용도 많이 나타나는 편이라 왠만하면 약을 안 먹고 견디는 편이거든요. 


그렇지만

그때 뭐가 되었든 치료를 했으면 이번처럼 심각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지도 몰라요. 


그러게요. 

그때 선생님하고 좀 더 얘기를 해 볼걸 그랬나봐요.



환자가 특별히 고집스럽거나 자기 주장이 강한 스타일은 아닌것 같다. 

겁이 좀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성격이 좀 예민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다지 특별한 캐릭터는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담당 선생님이랑 충분히 얘기가 잘 안되었나 보다. 3기 말이면 상당히 재발의 위험율이 높은 그룹이기 때문에 왠만한 의사라면 환자가 원하는대로 놔 두지는 않을텐데...



환자들은 

심리적으로 한번 위축되면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원하지 않는 정보는 잊어버리는 것 같다. 

의사로서 해야 하는 모든 설명을 다 해 주어도

나중에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이기도 하다.

우리처럼 대화 시간이 부족하고 진료의 많은 시간이 의사의 일방적인 독백 구조로 채워지는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내 환자 중에도 수많은 환자들이

나의 윽박지르는 듯한, 강요하는 듯한 설명에 질려서

다른 전문가의 의견과 설명을 듣고자 나를 떠나고 있을 것이다.

지정된 외래에 환자가 오지 않으면 외래 간호사 선생님을 통해 몇번 연락을 해 보게 하지만

일정 시간이 흐르면 차츰 잊혀진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환자를 만났을 때는

치료를 받지 않고 나름으로 건강추구행위를 하다가 많이 나빠지고 아파서 오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그때 왜 안 오셨어요?


너무 무서워서요.


저한테 그런 심정을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선생님 너무 바빠 보여서 더 설명을 요구하기가 어려웠어요.

열심히 설명하신거 같은데 제가 더 말하면 무례한것 같기도 하고 

선생님이 내 입장을 고려해 줄 것 같지도 않고 그랬어요. 


...


일차적으로는 시간이 문제다.


생전 처음 항암치료라는 것을 받아야 한다는데

내 병이

내 운명이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도대체 항암제라는 걸 맞으면 어떻게 되는건지

항암치료를 받으면 완치가 되는건지

항암치료를 받으면 일상 생활은 할 수 있는 건지

우리 가족은 누가 돌봐줄 수 있을지

돈은 얼마나 들지

당장 내일 아침 밥상은 나 대신 누가 차려줄지 


나를 처음 만난 환자들은 항암치료를 앞두고 불안감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치료 자체, 그리고 더불어 나의 미래. 


그런데 내가 그들에게 할애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심리적으로 위축된 그들에게 내 설명은 너무나 축약적이고 어렵고 공감하기 어렵다. 



그런데 만약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지면

잘 할 수 있을까?


미국에서 재진 암환자를 진료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5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던대로 15분 진료를 하는 그룹과 진료 시작 앞뒤로 20초씩 환자의 마음에 공감을 보이는 표현을 하도록 진료하는 그룹을 비교하여 환자의 만족도와 치료 순응도를 조사했더니 후자 그룹에서 월등히 만족도도 놓고 의사의 처방과 진료에 대한 순응도도 높게 보고 되었다고 한다. 

환자의 마음을 움직이는데는 40초의 시간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내 외래는 3분 진료라고 비아냥 대지만

사실 3분 혹은 5분만으로 진료가 끝나는 환자들은 별로 없다. 현재 병이 잘 조절되고 있고 증상이 없어서 자기 일상생활을 잘 하고 있는 일부의 환자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으로 진료가 가능하다. (그리고 그들과 그렇게 짧은 진료만으로도 문제가 안되는 것은 이미 그 전에 오랜 시간동안 같이 고생한 과거의 경험, 그리고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미 지지고 볶고 다 해서 서로 알 걸 다 알기 때문이다.) 


그런 안정적인 환자들 일부를 제외하고는 환자의 생활사 전반까지, 마음까지 다 묻는 외국 진료현실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사실 5분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10분에 3명이 예약되어 있는 내 외래는 늘 지연되기 마련이다. 아예 예약을 10분에 2명이상 되지 않도록 강제지정하면 오전 진료는 2시가 넘어서, 오후 진료는 6시가 넘어서 끝날 것이다. (나는 오전 진료는 아무리 늦어도 9시에, 오후 진료는 1시에 시작한다.) 

 

최대한 노력한다.


제 설명이 이해되시나요?

더 궁금한 것은 없으신가요?

마음에 꺼림찍한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많이 힘드시죠?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환자가 답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단 40초만이라도.



그래서

진료실 말잔치가 

공허한 나의 독백이 아니라

힘든 시간을 함께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우리의 대화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