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환자가 나랑 동갑내기, 2년째 호르몬 치료를 하고 있다.
그녀는 항상 엄마랑 같이 병원에 오는데,
외래 진료실 앞에서 이들 모녀는 늘 티격태격한다.
40 먹은 딸과 70 먹은 엄마.
둘다 neurofibromatosis. 추가적인 검사는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오늘 엄마가 촌지로 윌 10개들이 한박스를 나에게 선물로 주고 가셨다.
아침도 시원치 않게 먹었는데, 오전 진료를 보는 내내 저 박스를 뜯어서 두개 정도 한꺼번에 마시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그럴 시간도 없이 진료를 보아야 했다.
환자는 처음부터 폐전이, 뼈전이 상태로 진단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그리고 지금은 2년째 호르몬 치료를 하면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아직 유방에 만져지는 덩어리가 있다. 그래도 변화가 없으니 일단 지금 치료를 유지하고 있다. 나중에 방사선 치료를 할지 말지 고민중이다.
이들 살림살이는 넉넉하지 않다.
첫 치료를 임상연구로 할 때도 약이랑 검사 등이 지원되니 환자가 돈을 안 내도 된다고 하여 임상연구를 하시겠다고 하셨었다. 두 분 모두 뾰족하게 안정적인 돈벌이를 못하고 계신다. 딸은 예전에 회사를 다녔지만, 유방암 진단을 받고 나서부터 직장을 그만두었고 아직도 첫치료 탁솔의 손발저림 증상이 남아있어서 1시간 연속 걷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2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후유증이 남아 있다.
그런 살림에 윌 한 박스는 작은 선물이 아니다.
빠듯하게 살림 살고, 버스, 지하철 비용 아껴서 병원 걸어오는 환자 입장에서는 오늘 큰 마음 단단히 먹은 듯 싶다. 그러고 보니, 호르몬 치료 하면서 현재 상태를 유지해 온지가 이번달로 만 2년째가 되었다. 그날을 기념하신 것 같다.
전이성 유방암으로 오랜 기간 병치레를 하다보면, 살림살이를 넉넉하게 유지할 수 있는 환자들이 별로 없다. 그래서 유방암 환자들의 촌지는 아주 소박하다. 대신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진다.
직접 구슬을 꿰어만든 묵주 목걸이
직접 빚어 온 만두
직접 만든 짱아찌, 김장김치
간식으로 먹으라며 작은 락엔락 통에 담아온 견과류.
진료 볼 때 신발 벗고 발 시원하게 올려놓으라는 대나무 막대기.
선물이 어째 집에 있는거 들고 나온 것 같다.
먹어 보니 맛있었다며 사온 미나리.
제주도 여행 다녀왔다며 사온 한라봉.
새로 생긴 동네 커피가게에서 샀다며 구수하게 갈아온 원두커피 한봉지
환자 보다가 배고프면 먹으라며 커피 한잔, 빵 한개를 세트로 싸오신 꾸러미.
맛있는 걸 먹으니 친구 생각이 나서 하나 더 샀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선물도 고맙지만
나를 가까운 존재로 느껴주는 것 같아 고맙다.
정겹다.
화장품 보다는 와인 선물이 더 들어오는 걸 보면 환자들도 척 보면 알건 다 아는것 같다.
(와인 보다는 소주나 맥주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쩌려나 ㅎㅎ)
미국의 유방암 환자들은 대부분 60살이 넘었다.
유명한 정치인, 연예인의 아내, 유명한 스포츠 선수의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리고 치료받는다. 그의 이름을 딴 대단한 재단도 설립되고 후원회도 만들어지며 때에 따라 후원금도 많이 걷힌다. 어머니의 날 게임이 열리는 프로야구장에서는 10달러짜리 핑크리본을 팔아 후원금을 모금하기도 한다. 성인 여성 8명 중에 1명이 유방암이라고 하니, 환자 수가 만만치 않으며, 이러한 후원단체 혹은 환자 자조모임의 활동이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여러 암중에서 유방암 연구비가 제일 많다고 한다.
한국의 유방암 환자들은 대부분 40대 중반이다.
한창 입시준비하는 자식들. 승진이냐 명퇴냐를 고민하는 남편. 나라도 부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40대 중반의 엄마가 유방암에 걸리면, 그동안 엄마 혼자 감당해 왔던 모든 집안일이 엉망진창이 된다. 폐경기에 가까운 나이, 항암치료 호르몬치료를 하고 폐경이 앞당겨 진다. 자연 폐경보다 치료로 유발된 폐경기가 훨씬 힘들다. 폐경기 증상으로 몸과 마음이 다 무겁다. 우울하기도 하다. 그러나 병에 걸린 엄마를 챙겨주는 가족이 별로 없다. 서바이벌하느라 힘든 남편, 입시 지옥에서 허덕이는 혹은 대학생이 되었어도 여전히 철이 없는 자식들. 친정식구에게 도움받기도 싫고 시댁 식구에게 내색하기는 더더욱 싫다. 한국 사회에서 엄마가 유방암에 걸리면 그 가족에 위기와 균열이 찾아온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한달에 한번 만나러 오는 나에게 그렇게 정성어린 촌지를 챙겨주는 마음을 알기에
난 진료실에서 무한히 기쁘고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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