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인턴일기

공연을 마치고

슬기엄마 2011. 2. 27. 21:49

공연을 마치고

 

나는 요즘 공포의 chest pain 환자들이 줄을 잇는 심장내과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새벽 5시면 어두컴컴한 병동의 불을 켜고 아침 EKG를 찍는다. 전날 coronary angiography를 시행한 환자들의 puncture site dressing도 회진 전에 끝내야 한다. 평균 10개 정도의 EKG 30분내로 찍는 것이 나의 목표다. 그렇게 부랴부랴 찍을라치면 어제와 오늘 EKG를 비교하는 진지한 자세는 언감생심이다.

유난히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몇몇과의 인턴들 얘기를 들어보면 routine dressing도 오전 회진 전에 다 마무리해야 하고 chest tube bottle깨끗하게비워져 있어야 하고 새벽 5시에 항상 ABGA를 해야 한단다. 어떤 날은 dressing set가 부족해서, 어떤 날은 새벽부터 무슨 피를 뽑느냐며 화를 내는 환자를 설득하느라, 결국은 레지던트 선생님께 혼줄이 난다. 도대체 요즘 인턴들은 뭘 하는지 알 수 없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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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당일 무슨 검사를 했으면 주치의는 오후 회진 때 그 결과를 윗년차나 staff에게 notify해야 한다. Image study를 했으면 진단방사선과의 official reading을 받아야 하고 EGD echo를 했으면 결과지가 chart prep되어 있어야 한다. 오후 회진에 대비해서는 병원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각종 검사지를 챙기고, 안 나온 reading을 빨리 부탁한다는 메모들을 판독실에 남긴다. Old chart에 있는 자료들을 복사해서 병동 chart prep하는 일도 간간이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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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 계열의 인턴들은 일이 좀 더 많아 보인다. 디지털 시대라지만 아직도 각종 장부들이 많다. 그 장부를 정리하고 종합해서 문서로 만들고 잠자는 윗년차를 깨워 confirm 받고 프린터로 인쇄하고 그 장부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고…. 원내 전자네트워크 시스템을 이용해 수술 결정 당시부터 입력이 시작되고 모든 process one-stop으로 결정될 수는 없는 걸까? 유령처럼 새벽 2∼3시에 병동과 의국, 인턴방을 오가는 동료 인턴들의 퀭한 눈동자를 보면 마음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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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공연이 무사히 막을 내리기까지, 무대 위의 배우도 중요하지만 무대 뒷면에서 보이지 않게 뛰어다니며 일하는 스탭진들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인턴은 병원에서 펼쳐지는 회진, 수술 등의 중요 공연을 위해음지에서 일하지만 양지를 지향하는스탭진의 말단이다. 조명이 제대로 준비되지 못해, 음향 기기가 원래 싸고 질이 나빠서, 공연 장소가 비좁아서…, 이런 변명은 중요하지 않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 관객들의 반응과 환호성이 그 모든 것을 설명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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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내가 일하는 병원이, 한국의 의료제도가, 우리 과의 현실이 어떻다는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묵묵히 뛰고 일이 성사되기 위해 기꺼이 발품을 판다. 다만, 나도 언젠가 무대 위로 올라갈 배우가 될 텐데, 막일을 하면서 배우의 소양을 키우고 연기지도를 받는 일이 병행되지 않으면 나는 막상 무대 위에 서게 되었을 때 감동을 전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배우가 되고, 내가 속한 극단에 대한 세인들의 평은 점점 나빠지며 관객이 줄어들 것이라는 점을 극단의 대표가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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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교과서의 이론뿐만 아니라 일대일로 연기지도를 받는 과정에서 연기자의 자질이 경험적으로 습득되는 측면이 강하다면, 내 윗사람이 극단 내에서 취하는 태도, 선후배를 대하는 방식 등이 언어화되기 이전에 나를 체화시키게 되고 나도 유사한 방식으로 후배를 지도하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1년 뒤에 나는 인턴들에게 어떤 선배의사가 되어 있을지 가끔 무서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