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서 엄마가 준 커피
내 캐비닛 구석에는 시커멓게 말라붙은 커피자국을 드러낸 빈 병 하나가 있다. 편의점에서 한 병에 3천원이 넘는 값에 팔리는 고급커피다. 이 커피는 내가 소아외과에서 일할 때 만났던 6개월 된 아기 민서의 엄마가 준 것이다. 출생 직후 tracheo-esophageal fistula가 발견되어 수술을 하고, stenosis된 부위에 bougination도 하고, aspiration pneumonia도 생기고, 자꾸 토해서 체중도 늘지 않고, 그래서 민서는 집에 있는 날보다 응급실에 오거나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날이 더 많은 아이였다.
처음 민서 엄마를 보았을 때 엄마는 왜 자꾸 X-레이를 찍느냐, 뽑기도 어려운데 피검사는 왜 하느냐, 약을 먹는데도 왜 계속 토하냐는 등 불만 섞인 질문을 많이 했다. 가끔은 아기 곁에서 울고 있기도 했고, 새벽에 보면 겨우 잠든 민서 옆에서 쪼그려 자고 있기도 했다.
담당 선생님은 민서 몸무게가 6kg을 넘을 때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자고 아예 못을 박으셨다. 회진 때마다 몇 번 토했는지, 몸무게는 얼마나 늘었는지, 잠은 잘 자는지 등을 점검했지만,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상태에서 나는 다른 과로 옮겨갔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소아병동을 지나다 아직도 그 자리에 민서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고 안부가 궁금해졌다. 어느새 6kg가 되어 있는 민서는 얼굴과 팔다리에 살이 오르고 기운차게 몸을 들썩이며 뒤집기를 하고 있었다. 낯도 별로 가리지 않고 까르륵 잘 웃는다. 모든 아기들이 웃는 모습은 천사 같지만, 아파서 시름시름 앓던 녀석이 좋아지고 나서 웃는 웃음은 정말 예뻤다.
민서 엄마는 기운을 다 민서에게 빼앗긴 듯 얼굴이 수척했지만, 표정만은 참으로 밝았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검사를 받고 무슨 시술을 받았는지, 다음주면 퇴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까지, 묻지도 않는 말을 하면서 즐거워한다.
민서 상태가 좋아지니 소아병동을 지날 때 가끔 들르는 일에 부담이 없어졌다. 내가 인턴에 불과하고 지금은 다른 파트에서 일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꼬박꼬박 의사 선생님께서 잘해주셔서 그렇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내가 뭘 해 줬는데?’ 어색하기 짝이 없다.
우연히 캐비닛에서 무슨 학회 때인지 기념품으로 받은 립그로스를 발견했다. 병동을 지나다 민서 엄마에게 건넸다. 병동 공기가 건조해서인지 엄마 입술이 다 부르트고 갈라져 있는 게 안쓰러웠었다. 다음 날 오후 소아병동을 지나는데 민서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부르더니 냉장고에서 커피 한 병을 건네준다. “병원 안에서 뭐 살 게 있어야죠”라며. 그 커피가 맛있기도 했지만, 그렇게 나를 기억하고 있다가 건네준 마음이 더 고맙다. 정작 나는 한 것도 없는데 이러실 필요 없다고 말하자, “관심을 갖고 한번씩 들러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데요”라고 한다.
상태가 좋지 않고 별로 호전되는 것도 없어 보이는 환자들을 아침저녁으로 만날라치면 내심 마음이 갑갑하다. 하지만 힘든 시간들을 잘 견디고 난 후 환자 상태가 좋아지면 의사는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 된다. 의사의 직업적 역할이 환자를 치료하는 것인데,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 ‘능력 있는 의사’ 뿐만 아니라 ‘고마운 의사선생님’도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의사는 좋은 직업인 것 같다. 아직은 내가 누군가에게 고마운 존재가 되는 것보다는 의사에게 요구되는 능력을 갖추는 것에 치중해야 할 때라는 생각도 들지만, 가끔 환자가 나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는 걸 느낄 때면 참 기분이 좋다. 이 맛에 의사를 하는구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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