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슬기의 일기 - 6

슬기엄마 2012. 7. 20. 07:02

나의 든든한 백업, 아빠

 

우리 집은 엄마가 더 바쁘다. 저녁이면 퇴근하는 아빠를 만날 수 있지만 엄마는 만나기 힘들다.

심지어 이번 기말고사 기간 동안 엄마는 학회 차 미국에 나가셨다.

수 년 전부터 이런 일상이 반복됐기 때문에 초등학교 때부터 엄마 대신 아빠가 내 교육에 더 신경을 쓰고 계신다.

 

아빠는 대화를 하다가 애매하거나 궁금한 것이 생기면 즉시 책꽂이 앞으로 달려가셔서 필요한 내용을 찾아보는 습관을 갖고 있다. 집 안에 관련 책자나 자료가 없으면 아이폰으로 검색을 하거나 나중에라도 다시 찾아보는 집념이 있으시다. 정말 꼭 찾아보신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학원이라고는 안 다녀봤는데

4학년이 되니 아빠는 최소한의 선행이라도 하는 게 좋다며 초등학교 전과정의 수학 교과서를 구해 수학 선행학습을 도와 주셨다.

나는 손을 움직여 필기를 하거나 문제를 푸는 행위를 매우 싫어했는데, 그런 속성을 파악한 아빠는 공부하는 시간에 직접 문제도 같이 풀도록 지도하셨다.

물론 중학교 1학년 수학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가족관계의 악화를 우려해 더 이상 같이 공부하지 않기로 했지만.

 

학교에서 학부모가 참여해야 하는 상담이나 공개수업에는 외할머니가 참석하셨지만, 중학교에 들어오자 외할머니가 커버할 수 없는, 아빠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대디폴리스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아빠는 작년부터 대디폴리스에 참여하셨는데, 한 학기에 3~4번 참여해야 하고, 돌아가며 동네를 순찰하는 일을 하셨다. 밤 늦은 시간에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쁜 짓(!) 하는 청소년을 찾아 지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대디폴리스 제도 초반에는 한 그룹 안에서 어떤 사람은 한 번 밖에 참석하지 않고 그 사람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이 그 그룹이 당번일 때마다 순찰을 돌았어야 했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체면치레로 한두 번 정도만 참석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아도 특별히 그런 상황을 체크하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아빠는 그런 사람의 대타 당번까지 서시며 순찰을 서 주셨다. 두세 시간 걷는 것은 상당히 운동이 되는 거라며 기쁜 마음(!)으로 밤 늦게까지 순찰을 돌다 들어오시곤 했다. 올해는 제도가 정착돼 당번이 확실하게 정해졌는데, 밤 운동거리가 없어졌다며 아쉬워하신다.

 

아빠는 참 성실한 분인 것 같다. 아직도 외할머니와 아빠가 내 교육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다.

 

곧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해야 한다. 고등학교 준비나 시험공부에 민감해지기 마련인 이 시점, 아빠는 시험공부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한다 하시며 강산이 세 번 정도 변한 30여년 과거 아빠의 학습경험담을 들려주신다. 마음만은 고맙지만, 솔직히, 지금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예전 학생들은 과외도, 학원도 없이 학교 갔다 와서 숙제, 적당히 공부하고 밖에서 친구들과 비교적 자유롭게 만나서 놀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매일 복습하고 평소에 영어, 수학하고, 시험기간에는 암기과목을 집중적으로 하면 어려울 게 없다는 원칙적인 말씀을 하시지만, 솔직히 요즘은 중학교, 아니 초등학교, 심지어는 유치원 때부터 치열하게 경쟁하고 정말 독하게 공부하는 학생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된 것 같다.

 

30년 전 아빠가 공부하던 이야기를 하시면, 아니 지금 누굴 놀리시나….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빠는 이제 중3이 된 내 공부 영역에는 들어오지 못하신다. 아빠가 접근하기에도 이미 상당히 어려워졌나 보다. 그래서 아빠는 공부하는 걸 그냥 지켜보신다. 예민해할까 봐 별 말씀은 없으시다. 말을 돌려 돌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는 메시지만 전하신다. 나는 그런 걸 느낄 때면 아직도 가끔은 울컥하지만, 그래도 아빠가 나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시려고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무식하게 ‘공부 많이 했어?’, ‘시험 잘 봤어?’ 그런 질문을 팍팍 하는 엄마, 내가 공부하는 것에 거의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엄마와는 시험 후 스트레스를 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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